"위대한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사실에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 "

애플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한 말이다. 애플의 모방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인용 컴퓨터 '매킨토시'에 사용된 기술 상당 부분은 복사기업체 제록스 연구원들의 아이디어에서 따왔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물론 아이튠즈도 기존에 있던 제품과 서비스를 결합해 만들었다. '혁신적 모방'으로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업체를 만든 셈이다.

항공업계에도 모방을 통해 성공한 기업이 있다. 아일랜드 저가 항공사 라이언에어가 단적인 예다. 이 회사의 반전 스토리는 19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벤치마킹 모델은 세계 저가 항공업계의 선두주자 사우스웨스트였다.

◆선두 주자를 능가하는 추격자

마이클 오리어리는 1994년 부도 직전이었던 라이언에어를 인수했다. CEO 자리에 오른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우스웨스트 연구'였다. 회사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경영 방식도 분석했다. 그리고 사우스웨스트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라이언에어 살리기에 나섰다. 핵심은 '가능한 모든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첫 번째 타깃은 비행기 티켓 유통구조였다. 사우스웨스트는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웹사이트를 통해 티켓을 판매하고 있었다. 유통에서 한 단계를 없앰으로써 항공권 가격을 낮추기 위한 것이었다. 라이언에어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직접 판매 비중을 사우스웨스트보다 높인 것.사우스웨스트는 티켓의 88%만을 직접 팔았지만 라이언에어는 아예 판매대리점 자체를 두지 않기로 했다. 항공권의 100%를 직접 팔아 티켓을 최저가로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포지셔닝의 저자 잭 트라우트가 제시한 추격자의 전략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그는 "업계에서 굳이 최초일 필요는 없다. 추격자는 선두 기업의 빈틈을 찾아 공략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이언에어는 100% 직접 판매를 생각하지 못했던 사우스웨스트의 빈틈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라이언에어는 좌석번호도 없앴다. 승객들은 탑승하는 순서대로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된다. 지정 좌석을 없애면 자리를 찾느라 복도 입구에서 길을 막고 있는 사람들이 사라져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발권과 탑승 수속에 드는 시간도 줄였다. 승객들은 예약한 티켓을 직접 프린트해 가면 바로 탑승할 수 있다. 다른 항공사는 항공사 프런트를 찾아 별도의 발권 수속을 밟아야 한다.

가방 사이즈도 제한했다. 기내에는 정해진 사이즈의 가방 하나만을 갖고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가방이 규정보다 크면 추가 요금을 받았다. 비행기 복도에서 짐을 올리고 정리하느라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경쟁상대는 기차와 택시

비즈니스위크는 라이언에어를 '날개 있는 월마트'라고 칭했다. 라이언에어를 이용하면 5유로(8000원)만 있으면 유럽 각 도시를 잇는 편도 항공권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런 원가 절감은 '여객기'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리어리 CEO는 시장과 경쟁자를 다시 정의했다. 라이언에어의 경쟁 상대는 기차,버스,택시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장을 전통적 항공업계가 아니라 대중교통 시장으로 규정했다. 기차,버스,택시로 4~5시간 걸리는 곳으로 떠나는 고객들이 주요 타깃이다. 그들이 대중교통 요금보다 적은 돈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게 하는 게 라이언에어의 유일한 목적이다.

다른 항공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가 서비스'를 모두 없앤 것은 이런 목적 때문이다. 비즈니스석도 없애고 모든 좌석에 동일한 가격을 매겼다. 좌석 앞쪽에 잡지 등을 넣는 주머니도 없앴다. 신문이나 잡지는 따로 주지 않고,안전 지침은 아예 의자에 스티커로 붙여놨다. 기내식과 음료도 원하는 사람에게만 돈을 주고 팔았다. 저가항공 이용자들이 원하는 것은 다양한 서비스가 아니라 '저렴한 여행'이라는 점에 집중했다.

◆비행기 한 대가 하루에 여덟 번 뜬다

라이언에어는 한 대의 비행기를 하루에 여덟 번 띄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른 항공사는 4~5회가 고작이다. 주유와 기내 청소,물품 준비,화물 싣고 내리기 등의 작업을 하는 데 비행기 한 대당 평균 25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비결은 다른 작업과 동시에 주유를 하는 것이다. 다른 항공사는 이륙 직전에 시간을 따로 내 주유를 한다. 라이언에어가 이용자가 적은 변두리 공항을 주로 이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다른 수익원 창출도 잊지 않았다. 오리어리 CEO는 라이언에어 항공기를 '커다란 광고판' 그 자체로 만들었다. 승객들은 좌석에 앉자마자 앞 사람 좌석 뒷면에 보다폰그룹,재규어 등의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리어리 CEO의 '저렴한 가격과 정시 출발만 보장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시장에서도 통하고 있다. 국제항공수송협회(IATA)에 따르면 라이언에어의 지난해 국제선 탑승객 숫자는 7120만명에 달했다. 2위를 차지한 루프트한자는 4460만명에 그쳤다. 오리어리 CEO는 이를 토대로 라이언에어를 유럽 최대 저가 항공사로 발전시켰다. 지난해에는 36억유로의 매출을 올리고,4억유로의 순이익을 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