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평화가 찾아왔다. " 1938년 9월29일 독일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 회담을 가진 뒤 런던으로 돌아온 네임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협정문을 흔들며 이렇게 외쳤다. 뮌헨회담은 체임벌린 총리가 주도했다. 의도는 순수했다. 히틀러발(發) 전쟁의 먹구름을 걷고 어떻게든 유럽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랜드를 넘겨 달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줬다. 히틀러가 그쯤에서 멈출 것이란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국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시 하원의원이던 윈스턴 처칠은 "1파운드를 주면 상대는 총을 다시 꺼내들고 2파운드를 요구할 것"이라며 "영국이 노상강도를 당한 셈"이라고 맹비난했다. 처칠의 예언은 적중했다. 히틀러는 6개월도 안 돼 체코의 나머지 지방을 병합한 뒤 폴란드를 침공했다. 2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그렇지만 체임벌린에게서 총리직을 이어받은 처칠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처칠은 자유선거를 통한 폴란드 정부 수립에 합의한 뒤 "소련의 신의에 자신감을 표명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를 철저히 농락했다. 동유럽 지역을 무력으로 삼킨 것이다. 자신의 개인참모인 네빌 콜빌조차도 스탈린에 당했다는 것을 꿰뚫었지만,처칠은 그렇지 못했다. 처칠은 얄타회담의 결과를 설명하는 하원 연설문에 "소련은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문구를 넣으라고 했으나 콜빌이 '뮌헨의 메아리'라며 삭제했다.

한반도 상황을 보자.2000년 6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남북한 정상회담을 끝내고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와 "한반도에 전쟁 위협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2002년과 2003년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시인,핵 비확산조약(NPT)탈퇴,5㎿ 원자로 재가동 등의 수순을 밟으며 보기 좋게 배신했다.

노무현 정부 때도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1차 핵실험 등 북한의 벼랑끝 전술은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4일 평양으로 가 김정일과 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반도 평화 보장,사상 · 제도를 초월한 신뢰관계 형성 등을 담은 공동선언문을 들고 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2차 핵실험,대포 발사,천안함 폭침이었다. 김정일은 자신의 전략적 목표에 맞춰 강 · 온 전략을 구사하며 합의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최근 남북 모두 얼어붙은 양측 관계에 돌파구를 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남북한 정상회담 추진설도 들린다. 2009년 말에 이어 지난 5월 남북은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가졌다. 6자회담 재개를 향한 관련국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지난달 남북이 2년7개월 만에 마주 앉았고,미국과 북한도 1년7개월 만에 만남을 가졌다.

문제는 독재자 김정일은 '핵포기 불가'라는 대원칙에서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지난달 핵 포기를 전제로 한 우리의 경제 지원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럼에도 남측은 천안함 폭침, 연평도 도발에 대한 북한의 사과가 없으면 대화도 없다고 했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는 양상이다.

집권 말기로 가는 이명박 정부나 내년 재선을 노리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모두 대북 문제에서 성과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이 대통령은 오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 담을 대북 정책 방향타를 놓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뮌헨과 얄타회담이 교훈이 될 듯하다.

홍영식 정치부 차장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