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포지엄' 풍경 묘사한 무덤 벽화, 이집트미술 그리스 전파 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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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랑추랑<美廊醜廊> - 정석범의 재미있는 미술이야기…(2) 분묘 미술의 그림자
옆 모습 얼굴·상체 정면 묘사 답습…동성애 등 귀족 남성 풍속 '생생'
옆 모습 얼굴·상체 정면 묘사 답습…동성애 등 귀족 남성 풍속 '생생'
1968년 6월3일 그리스 식민지였던 이탈리아 파이스툼에서 발굴 작업을 펼치던 고고학자 마리오 나폴리는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의 눈앞에 장차 그리스 미술사를 뒤엎을 한 석곽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길이 2.15m,너비 1m,높이 80㎝에 불과한 이 무덤의 규모는 작지만 그것이 꿰차고 있는 이야기 주머니는 기자의 피라미드 못지않았다. '잠수부의 무덤'으로 불리는 이 묘지에는 그리스인의 삶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벽화가 있어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우리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무덤 내부에 그려진 벽화의 내용이다. 천장에는 이 무덤의 주인공인 젊은이가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현세에서 내세로의 이동을 상징한다. 무덤의 명칭은 바로 이 천장화의 내용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무덤의 하이라이트는 사방 벽에 그려진 그리스 시대의 연회인 심포지엄 풍경이다. 심포지엄은 귀족 남성들의 연회로 전쟁에서의 승리,문학 경연에서의 우승과 같은 특별한 때에 열렸다.
참석자들은 기다란 쿠션 의자에 기대어 술과 음식을 나누며 토론을 벌이는 한편 술잔을 던져 목표물을 맞히는 게임을 벌이거나 노예들이 펼치는 공연을 즐기기도 했다. 이 연회에 대해서는 그간 플라톤의 《향연(심포지엄)》을 통해 대체적인 윤곽만을 알 수 있었는데 이 무덤의 발견으로 적나라한 면모가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남성들은 이 연회에서 동성애를 나누기도 했다. 보통은 나이든 남자와 젊은 남자가 커플을 이뤘다고 한다. 벽화에서 두 남성이 뜨거운 눈길을 교환하고 있는 장면이 그 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리스 문화가 화려한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인 기원전 480년께 그려진 이 벽화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리스 고전기의 예술이 신만을 위해 존재했던 게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사적 의미 못지않게 벽화의 가치를 높인 것은 회화양식이다. 이 그림에는 이집트 회화양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집트 미술은 무덤 내부의 장식을 목적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사자(死者)를 위한 미술'로 불린다. 이집트인들은 신이나 통치자는 영생한다고 믿어 이들의 형태는 순간적인 게 아니라 본질적인 모습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원칙은 모델을 정면성 중심으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얼굴은 측면으로 그리되 눈은 정면에서 본 한쪽만 묘사하고 어깨와 몸통은 정면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체는 측면으로 묘사하되 두 다리가 다 보이게 해야 했다.
잠수부의 무덤에서 사랑을 나누는 두 남자의 얼굴은 측면 모습이지만 상체는 정면으로 묘사돼 있어 이집트 회화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기 그리스 예술은 이집트 미술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결혼도 못하고 스틱스강을 건넌 한 청년의 무덤이 전해주는 사연이 참으로 두툼하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