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에서 프레젠테이션은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변수가 되기도 한다. 프레젠테이션 도입 초기였던 1998년,법무법인 광장의 권영모 변호사는 특허소송에서 프레젠테이션 기법을 활용했다. LG생명과학을 대리한 권 변호사는 미국 생명공학기업인 몬산토와 소 성장 호르몬제 관련 특허소송 기일에 광학투영기(OHP) 자료를 만들어 왔다. "DNA를 배합해 RNA를 만들고 이게 단백질이 되는데 식물성 오일과 혼합해서 주사제를 투여하고…."

복잡한 생명공학 특허를 '맨 입'으로 설명한 상대방 측은 권 변호사가 도입한 '최첨단 변론'에 당황했다. 상대방은 "다시 기술설명회를 열게 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고,광장에서는 "종이로 했든 OHP로 했든 각자 한 번씩 한 것이 아니냐"고 반발했다. 결국 재판부는 양쪽에 다시 기회를 주었고,권 변호사는 LG생명과학의 전문인력들과 파워포인트(PPT)로 자료를 작성해 맞섰다. 당시 광장과 함께 공동 대리를 맡았던 최종영 변호사가 나중에 대법원장이 돼 "예전에 권 변호사가 특허법원에서 PPT로 하니 이해하기 쉽고 좋더라.법원에 관련 장비를 갖추라"고 지시해 법원에 장비가 마련됐다는 후일담이 있다.

변호사들이 컴퓨터와 스크린,프로젝터를 다 들고 가야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대법원이 전국 330개 민사법정 중 전자법정(빔프로젝터,대형 공유화면,실물화상기,녹음 · 녹화시설,당사자석 노트북 등을 갖춘 법정) 비율을 현재 119개소에서 연말까지 52개소를 추가,51%(171개소)까지 확충하겠다는 요즘 프레젠테이션은 단골 변론 기법이 됐다.

◆판사 졸음 유발할까 초조

변호사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은 부담이기도 하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프레젠테이션 제작을 외주업체에 맡기면 장당 최대 50만원을 요구한다"며 만만찮은 비용을 아까워했다. 조용환 법무법인 지평지성 대표 변호사는 재판 전 하루 2~3시간 자면서 본인이 직접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작성해 법정에서 변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중소형 로펌 소속 변호사는 "이미 서면으로 제출한 자료 요약 수준으로 만들어 화면에 글자만 빼곡하게 하는 등 프레젠테이션 제작에 서투른 변호사들이 많다"며 "그런 프레젠테이션은 고객들에게 '이만큼 노력했다'고 과시하는 용도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프레젠테이션 진행 도중 판사가 잠들까봐 걱정하는 변호사도 있다. 외국 회사를 대리해 특허소송을 진행한 모 대형 로펌은 2개월여를 투자해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다. 기술설명회 시간은 점심시간 직후인 오후 2시였다. 불이 꺼지고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자 재판장을 비롯해 배석판사 2명까지 모두 잠들어 담당 변호사는 당황했다.

그는 "잠을 깨우기 위해 일부러 농담도 했지만 요지부동이었고,상대측 변호사가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나마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줄듯 말듯 해야…눈치전이 승부수

기업들은 큰 사건 자문이나 변호를 맡기기 위해 대형 로펌 여러 곳에 '비딩'(입찰)을 부친다. 이때 로펌들은 프레젠테이션으로 승부수를 띄운다. 일부 대형 로펌들은 소속 변호사를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 속성 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빅딜' 수임을 위해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대형 로펌들을 줄세워 최종 승자를 선발하기 때문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빗대 '뷰티 콘테스트'라고 불린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프레젠테이션 장소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차 안에서 연습한다"고 긴장감의 강도를 전했다. 하지만 그는 "프레젠테이션의 질만큼이나 중요한 게 눈치전"이라고 귀띔했다. "속된 표현으로 '줄듯 말듯' 선을 지켜야 합니다. 영화 예고편과 비슷하죠.클라이언트가 '여기에 맡겨야겠구나'하는 마음이 동할 정도로 하되,핵심 전략은 노출시키면 안 됩니다. 악질 클라이언트는 실컷 듣고 아이디어를 빼내요. 결국은 다른 로펌에 사건을 맡기면서도 '어디에서는 이렇게 대응하겠다던데…'라고 알려주며 우리 전략을 도용하기도 해요. 프레젠테이션에서 핵심 전략 하나라도 더 들어 보려고 유도신문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면 머릿속에 든 걸 사냥당하는 느낌이 들어요. "

◆프레젠테이션으로 후일 기약

고객이 이미 사건을 맡길 로펌을 내정해 놓았을 경우에는 힘든 싸움이 된다. 이미 경쟁 로펌으로 내부 낙점이 끝났다는 소문이 돌았던 사건 수임을 위해 나선 모 변호사는 "프레젠테이션에서 내정 로펌보다 우리 로펌 역량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준비된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형식적으로 듣고 있는 클라이언트에게 대안을 제시하고 '그렇지 않습니까?'란 역공을 펼쳐 내정 로펌을 제칠 수 있었다"고 진땀 나는 무용담을 전했다.

해당 사건 수임에는 실패하더라도 뛰어난 프레젠테이션으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후일을 기약할 수도 있다. 대형 로펌의 한 변호사는 금융회사의 대형 소송 건을 수임하기 위해 이틀 밤을 새가며 PPT 90장을 작성했다.

그의 경쟁자들은 5~7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 변호사는 "금융회사는 업계 인맥이 넓다는 이유로 5장 프레젠테이션한 로펌을 선택했다"며 "하지만 90장의 정성에 감복했는지 다른 자문 건을 맡기더라"고 말했다.

이고운/임도원/심성미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