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에 다니는 한상구 씨(48)는 18일 낭패를 당했다. 자녀들의 2학기 대학 등록금 부족액을 대출받으려고 은행 두 곳을 들렀으나 안 된다는 말만 들었다. 그는 "은행들이 한꺼번에 대출을 금지하면 서민들은 사채를 쓰라는 얘기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회사원 김모씨(32)도 지난 16일 저녁 거래하던 은행으로부터 황당한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금융감독원 가계부채 억제 정책으로 제1금융권은 8월17~31일 대출을 중단했으며 기존 접수한 대출은 9월부터 시행 예정입니다. 현재 대출은 제2금융권에서만 가능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아파트 입주가 당장 열흘 뒤인데 아무 얘기도 없다가 갑자기 대출이 취소됐다고 하면 잔금 지급은 어쩌라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은행에서 가계대출을 중단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금융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하고,금융당국은 은행이 무리한 조치를 내린 것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금융당국이 빌미 제공

금융위원회는 지난주 시중은행의 여신,자금 담당 부행장들을 두 번이나 소집해 "가계대출 증가폭을 명목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수준인 연간 7%대 수준에서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또 "연간 증가폭을 기준으로 월별로 꼼꼼히 점검하라"고 덧붙였다.

이는 금융위가 지난 6월 발표한 가계부채 종합대책의 연장선상이었다. 은행들은 월별 증가폭 목표치를 연간 명목 GDP 증가율을 나눠서 적용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7%대를 12개월로 나누면 0.6% 안팎이 나온다. 일부 은행은 8월 들어 가계대출 증가액이 7월에 비해 0.6%를 넘자 신규 대출을 중단해 버렸다.

◆농협이 대출 중단 주도

은행권에서 가장 먼저 가계여신을 중단한 곳은 농협이다. 농협은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등 모든 신규 대출을 이달 말까지 한시 중단하기로 했다. 농협은 지난달 중앙회 및 지역농협을 합쳐 가계대출을 1조6000억원 늘렸다.

전체 금융권 증가액 4조3000억원의 37%다. 지난 4월 전산망 마비 사태로 영업력에서 타격을 입은 후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가계대출을 공격적으로 늘렸는데 금융당국 경고를 받자 일시에 중단했다는 후문이다.

농협에서 대출받지 못한 고객이 타 은행으로 옮기면서 대출 수요가 급증하자 신한은행과 우리은행 역시 여신 중단 조치에 동참했다. 하나은행은 전면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실수요자 위주로만 대출해주고 있다.

한 은행 부행장은 "주식시장이 급락하자 직장인 대상 마이너스 대출이 일시적으로 늘었는데 주가가 떨어지면 부실화할 가능성이 많아 신규 대출을 억제했다"고 말했다.

◆금융위 "이건 아닌데…"

금융당국은 은행의 대출 중단에 당황하고 있다. 지난주 부행장들에게 가계대출 억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일부 은행이 당국의 방침을 과도하게 해석해 자체적으로 가계대출 취급 전면 중단이라는 무리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는 당국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강력한 경고를 보내자 은행들이 목표치를 맞추기 위해 이달 말까지 가계대출 중단이라는 무리수를 뒀다고 판단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가계대출을 전면 중단하는 행위는 영업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은행법에 정면으로 어긋난다"며 "즉각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대출을 전면 중단한 은행들이 즉각 시정하지 않을 경우 특별검사를 벌여 제재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류시훈/조재길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