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이 모토로라를 인수하고 휴렛팩커드(HP)가 하드웨어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하면서 소프트웨어(SW)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동안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이 위기에 처했다느니,소프트웨어 인력이 현장을 떠난다느니,대학 소프트웨어 학과가 정원 미달이라는 얘기는 수없이 나왔다.

소프트웨어 전문가인 김흥남 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김 원장은 소프트웨어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거침없이 얘기를 이어갔다. 90분으로 예정했던 인터뷰는 3시간 동안 계속됐다. 김 원장은 소프트웨어 기반이 붕괴된 지금은 정부가 충격요법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소프트웨어 기업 인증제,소프트웨어 · 하드웨어 분리발주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소프트웨어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동안 애를 많이 썼는데도 풀리지 않았죠.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단순하게 풀어야 합니다. 문제는 돈과 사람입니다.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 제대로 추진한다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하는 사람들이 남보다 2,3배 돈을 벌 수 있어야 합니다. 소프트웨어가 돈이 돼야 합니다. 현실은 어떻습니까. 시스템 통합(SI) 업체들이 프로젝트를 헐값에 따내 하청,재하청을 줍니다. 돈을 못 버니까 '3D산업'이 되고,'월화수목금금금'이란 말이 나오고,소프트웨어 생태계가 무너진 것이죠."

▼어떤 방법이 있겠습니까.

"악순환을 끊으려면 정부가 충격요법을 써야 합니다. 공공 프로젝트 수 · 발주 시스템을 혁신해야 합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분리 발주하고,일정 등급을 받은 사업자만 입찰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대신 대가를 제대로 지불해야죠.미국은 1980년대 초 카네기멜론대에 의뢰해 '소프트웨어 기업 등급제(CMMI)'를 만들어 시행했습니다. 정부 입찰에 참여하려면 레벨3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실력은 따지지 않고 낮은 가격을 써낸 업체에 일을 맡기니 부실이 되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소프트웨어 담당자들만 골병이 듭니다. "

▼그렇게 하면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까요.

"미국이 처음 소프트웨어 기업 인증제를 도입했을 때도 반발이 많았습니다. 1년에 500억원씩,20년 동안 1조원을 들였습니다. 그래도 성과가 없자 한때는 소프트웨어 공학이 인기가 없었죠.그러나 인증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내공이 쌓였습니다. 일정 레벨을 따면 경쟁사보다 2,3배를 벌 수 있는데 안 할 수가 없죠.지금은 미국을 따라올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 100대 패키지 소프트웨어 업체 중 83개가 미국 기업이라고 합니다. 제도를 바꾸는 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죠.대학에서 소프트웨어 생산기술도 가르쳐야 합니다. 건축으로 치면 건축기술입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먼저 건축주로부터 요구사항을 들어 정리하고,여기에 맞춰 설계하고,이 설계도를 가지고 시공하고,그 다음에는 감리를 받고…소프트웨어도 이렇게 해야 하는데 우리 대학에서는 한 학기 한 과목으로 끝냅니다. "

▼대기업 SI업체들이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을 망쳤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은 어떤가요.

"미국엔 대기업 계열 SI업체가 없습니다. 제너럴모터스(GM)의 경우 계열 SI업체를 세우지 않고 외부 전문업체에 맡깁니다. 외부 업체가 훨씬 싼 가격에 잘하기 때문이지요. 소프트웨어 기업이 클 수 있는 생태계가 조성돼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와 일본 독일 등은 대기업 계열 SI업체들이 있는데,독일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룹 내부회계와 외부회계를 분리하도록 한 것이죠.이렇게 하면 내부 물량만 믿고 외부 프로젝트를 헐값에 따낼 가능성을 줄일 수 있습니다. "

▼뿌리 깊이 고착된 악순환 생태계가 쉽게 바뀔까요. 미국이 CMMI 도입할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를 텐데요.

"우리 실정에 맞는 해답을 찾아야죠.100억원을 밑도는 프로젝트는 대기업이 참여하지 못하게 하자는 얘기도 하는데 시장이 왜곡되다 보니 이런 강수를 생각하는 것이죠.ETRI는 프로젝트를 단계별로 분할 발주하려고 합니다. 분할 발주를 하면 요구사항 정리,설계,구현,테스트,감리 등을 체계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소프트웨어 1.0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만들지만 2.0은 영원히 만들지 못한다'고들 말합니다. 체계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바뀌면 업그레이드를 못합니다. "

▼태블릿,컴퓨터 등이 통합되는 시대로 가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저는 정보기술(IT)을 설명할 때 4개 레이어(분야)로 나눕니다. 네트워크 인프라,단말기,소프트웨어 플랫폼,콘텐츠 · 서비스 등입니다. 네트워크는 우리가 잘합니다. 초고속 인터넷은 세계 최고이고 와이브로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죠.단말기 하드웨어도 잘하고,콘텐츠 · 서비스도 그런 대로 합니다. 문제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이죠.플랫폼이 약하다 보니 위 · 아래 연결이 안 되는 것이죠.이제 각개약진하고 있습니다. 삼성은'바다'를 개발하고,SK텔레콤은 SK텔레콤대로,KT는 KT대로 플랫폼을 만들려고 합니다. 플랫폼은 혼자 힘으로는 안 됩니다. 자칫 우물 안 개구리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애써 개발했는데 아무도 써주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죠.오픈소스 기반의 플랫폼을 공동으로 구축해 글로벌 얼라이언스(세계적인 연합)를 추진해야 합니다. 그동안 구글의 안드로이드만 가져다 썼는데 이것만 믿을 수는 없죠.각종 단말기가 통합되는 시대에 대비해 제3의 플랫폼을 개발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힘들고 돈도 많이 드니까 국가적 과제로 지정해 함께 추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

▼모바일 트래픽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ETRI는 '기가코리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데 어떤 프로젝트인가요.

"올봄에 '롱텀이볼루션(LTE) 어드밴스트' 기술을 발표했는데 이게 진정한 4세대 이동통신 기술이죠.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영화 한 편을 9초 만에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기가코리아는 네트워크도 기가급,단말도 기가급,플랫폼과 콘텐츠도 기가급으로 끌어올리자는 프로젝트입니다.

무선이 기가급이니까 유선은 수십기가가 되겠죠.목표시기는 2020년입니다. 기가급 콘텐츠 중에는 홀로그램도 있습니다. 현재 무안경 3D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데 좀더 실감나는 3D가 홀로그램입니다. "

▼ETRI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도 있고 분할하자는 얘기도 있는데요.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IT 융합과 IT 고도화입니다. 조선-IT 융합,자동차-IT 융합,이런 것도 중요하고 계속 융합하려면 IT를 끊임없이 고도화해야 합니다. 두 축을 균형있게 가져가는 게 우리 임무입니다. ETRI 분할론은 시대 흐름에 맞지 않습니다. 네트워크,단말기,플랫폼,콘텐츠 · 서비스를 함께 발전시켜야 하는데,ETRI를 쪼개면 시너지가 사라집니다. IT 4개 분야 안에서 융합을 추진하고 융합한 기술을 다른 분야로 확산시키는 추세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분할해서는 안됩니다. 통합 연구소로 두는 게 맞습니다. ETRI를'IT 국가대표'로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연구원 처우나 주변환경 등은 ETRI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대덕연구단지에 46개 연구소가 있고 제가 과학기술출연기관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는데,대덕연구단지 2.0 얘기를 많이 합니다. 대덕연구단지는 1971년에 들어섰습니다. 지금까지가 1.0이라면 이제 2.0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단지 옆에 과학비즈니스벨트가 들어서는 게 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연구하기 좋고,창업하기 좋고,애들 키우기 좋다면 그게 2.0이고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 되는 것이죠."


김흥남 원장은…선박 네트워크 개발 주도


김흥남 원장(55)은 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으로는 드물게 보는 소프트웨어(SW) 전문가다. 서울대에서 전산학을 공부했고 미국 볼(Ball) 주립대와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전산학 석 · 박사 학위를 땄다. 과학기술연구원(KIST)과 시스템공학연구소(SERI)를 거쳐 1998년부터 ETRI에서 일하고 있다. ETRI에서는 내장형SW연구팀장,임베디드SW기술센터장,혁신위원장,임베디드SW연구단장,기획본부장 등을 지냈다. 현재 대한임베디드공학회장,한국통신학회 부회장과 과학기술출연연구기관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김 원장은 2000년대 초반에는 현대중공업 선박통신네트워크(SAN) 개발을 주도했다. 총연장이 10㎞에 달하는 선박 내 통신선을 1㎞로 줄여 네트워크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였고 통신위성을 통해 육지에서도 선박을 추적 ·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KIST에서 일할 때는 1988년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 개발에 참여했다.

김광현 IT전문기자 k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