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뒤뜰의 감나무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웠다. 진홍빛 감과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꿈틀거린다. 인상주의 화풍의 그림이지만 사실적인 질감과 알록달록한 색감에서 힘이 넘쳐난다. 강인한 생명력을 피워내는 중견화가의 향토적 감성을 훔쳐보는 기분이다.

오치균 씨(56)의 감나무 그림에서는 가을의 서정과 함께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현대 강남점에서 오는 24일부터 내달 20일까지 펼쳐지는 오씨의 개인전에는 3년 동안 그린 대형 감나무 풍경화 10여점이 걸린다.

그는 붓 대신 손가락으로 물감을 덧칠하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을 활용해 시골 감나무와 강원도 사북 탄광촌,서울,뉴욕 등의 도시 풍경을 주로 그린 '블루칩'작가. 1991년 작품 '북악산 풍경'이 2006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1억4000만원에 팔린 뒤 '억대 작가' 대열에 합류했고,2007년 6월에는 50호 크기의 '길'(122.5×82㎝)이 5억원에 낙찰돼 자신의 경매 최고가를 경신했다.

그는 몽환적인 상상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감나무를 양파 껍질 벗기듯 풀어낸다.

"초등학교 시절 감을 따던 기억이 나요. 어머니는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감을 곱게 닦고 광주리에 담아 새벽 첫차를 타고 가서 팔아 먹을거리를 구해왔죠.그때의 지겨웠던 고향 땅에 대한 기억이 이제는 그리움으로 변했고,빨갛게 떨어진 감은 어떤 시보다 강렬하게 제 귓속에 바삭거립니다. "

여명에 빛나는 감,한낮의 햇빛을 머금은 감 등이 잘 익은 '희망의 빛'처럼 다가온다. 대부분의 그림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을색이 짙게 밴 뒤뜰이나 앞마당에 주렁주렁 감이 매달려 있다. 다양한 리듬으로 휘몰아 감기고 뻗어나가는 가지와 불타오르는 듯한 색감은 고향과의 단절과 소통 방식을 동시에 드러낸다.

최근 공황장애(극단적인 불안 증상)로 병원을 자주 찾는 그는 병마와의 싸움도 화폭에 쏟아냈다.

"감에 응어리진 기억이 가슴을 때리더군요. 작업실에 박혀 하루 종일 고향인 충남 대덕의 감나무를 그렸습니다. 상(像)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을 좇다보면 예술의 극치가 인간의 원초적인 귀소본능과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더군요. 감나무가 추억을 자극하는 그 순간을 바로 그렸죠."

그는 "단순히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색감이 움직이는 살이나 뼈를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나무을 통해 현대인의 환희와 절망,허무와 욕망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풍경화뿐만 아니라 누드에서도 작품 구상이나 주제,기법을 이야기로 담아내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대상이 충동질해서 그릴 뿐이지 그림에 메시지를 넣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면 "예술의 목적은 생명을 꽃피우기 위한 것,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는 그의 말이 실감난다. 오씨는 내년 6월께 일본 우에노로얄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질 예정이다. (02)519-08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