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공생' 설계주의 함정 빠지지 말아야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 8 · 15 경축사 화두로 '공생발전론'을 던졌다. 공생발전론은 공정사회론에서 파생된 '동반성장'의 완결판으로 유추된다. 대통령 입장에서 화두는 국정운영의 고삐를 조일 수 있는 좋은 수단일 수 있다. 하지만 화두가 연례화되면 화두를 위한 화두,화두의 무게를 갖지 못한 화두가 던져질 수 있다. 화두가 깊은 성찰 없이 '정책의 옷'을 입으면 졸속으로 흐르게 된다. 이미 '공정사회'에서 경험한 바 있다. 공생발전론도 동일한 위험을 안고 있다.

8 · 15 경축사에서 '시장경제의 진화'가 언급될 때 '공생발전'은 예측가능했다. 이 대통령은 공생발전을 시장경제 진화의 최종 형태로 인식한 듯하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과도 중첩된다. 암묵적으로 공생발전이 '자본주의 4.0'임을 시사한 것이다. 상론할 겨를은 없으나,이 같은 사고체계에는 치명적 인식오류가 숨어 있다. 경제 질서는 소프트웨어처럼 설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4.0'은 금융위기 이후의 신(新)경제질서로 원형질의 상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로서의 미래를 특정할 수는 없다. 진화는 현실을 놓고 경합하는 제도를 현실이 택하는 것이기 때문에,진화는 사후적 개념이다.

사회적 진화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다윈의 진화이론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진화는 개체의 '변이'가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에 잘 맞는 변이들이 살아남으면 그 수가 증가한다. 자연선택 과정은 일종의 '제거과정'이다. 그리고 진화의 단위는 개체군(群)에 속한 개체다. 개체군이 한 번에 변하는 '대(大)진화'는 없다. 개체군의 점진적 재구성을 통해 진화가 진행된다. 이때 유전자들이 미래의 환경변화를 예측해서 스스로 바뀔 수 없기 때문에,진화에 미리 정해진 방향은 있을 수 없다.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몰고 갈 수는 없다.

사회가 진화하려면 자연선택의 소재가 되는 변이들이 끊임없이 풍성하게 나와야 하며,그런 변이들은 개인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나온다. 개인의 자유를 한껏 보장하는 '자유주의' 체제가 진화적 진보에 호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화론의 시각에서 공생이 완전하게 이뤄지는 곳이 '시장 생태계'다.

구체적으로 판매자는 생산을 조직한 뒤 경쟁을 통해 가장 높은 가격에 이를 사고자 하는 구매자를 탐색한다. 생산비를 보전한 판매자는 이번에는 구매자로 그 역할을 바꿔 경쟁을 통해 가장 낮은 가격에 이를 팔고자 하는 판매자를 탐색한다. 시장은 인지적 한계를 지닌 개인이 경쟁과정을 통해 서로의 지식을 활용하는 동시에 어떤 생산방식이 저렴한지,소비자가 어떤 제품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를 발견하는 곳이다. 공생은 '경쟁을 통한 협력'에 다름아니다. 공생발전은 '시장생태계'가 제대로 기능하도록 울타리를 칠 때 비로소 그 필요조건이 충족된다. 따라서 '공생발전'을 설계할 수 있다는 '사회공학적 사고'는 오류인 것이다.

사회 민주적 과정을 통해 '공생발전'이라는 목표에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부여하는 가치는 다르며 또한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지에 합의하기 어렵다. 반대로 방법에 대한 의견일치는 목적에 대한 의견불일치를 유발할 수도 있다. 남은 선택지는 중앙집권적 경제계획이다. 하나의 가치체계와 하나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하이에크가 설파한 '노예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공생발전'이라는 화두 대신 '시장의 활력'이 질식되지 않도록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원칙을 표명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작은 정부,큰 시장'에 충실하면 된다. 정부 입김을 줄이고 민간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보수정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공생발전은 화두를 위한 화두다. 화두는 자승자박이 되기 쉽다. '공생발전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생발전지수'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조동근 < 명지대 경제학 교수 /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