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법 위에 선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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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 A사무관은 최근 사흘 연속 새벽 3시를 넘겨 퇴근했다. 국내외 경제에 대한 리서치나,정책 수립을 위한 보고서 작성 업무가 밀려서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단순히 '기다리는 데' 썼다. 그는 "딱히 할 일도 없이 새벽까지 대기하는 건 큰 고역"이라며 "일에 몰두할 때보다 피로도가 훨씬 더 높다"고 토로했다.
A사무관이 이처럼 비효율적인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은 지난 22일 개회한 8월 임시국회 때문이다. 국회 대정부 질의가 시작되면서 그를 비롯한 상당수 공무원들의 주 업무가 '국회'로 옮겨갔다.
현행 국회법에 따르면 의원들은 국정 전반이나 특정 분야에 대해 장관(국무위원)을 상대로 질의할 수 있지만,질의 시간 48시간 이전에 구체적으로 작성한 질문 요지서를 정부에 보내야 한다. 정부가 이를 바탕으로 충실한 답변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조항이 사문화된 지는 오래다. 재정부 관계자는 "48시간은커녕 전날 담당 공무원이 의원실을 방문해 질의 요지를 요청해도 당일 새벽 2~3시나,아예 현장에서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달랑 사무관이나 주무관 1명이 담당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장관이 어떻게 속속들이 알 수 있겠느냐"며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대정부 질의 자체가 알맹이없이 흘러가게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의원들이 장관에게 어떤 분야에서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르다 보니 핵심 실 · 국 · 과장들이 일제히 국회에 진을 치는 풍경이 매년 되풀이된다. 강만수 산은금융 회장은 재정부 장관 시절 이 같은 모습을 보다못해 공식 석상에서 의원들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의원들도 나름의 할 말은 있다. 한 보좌관은 "질의 내용은 의원들 입장에서 '영업기밀'과도 같은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다듬고 또 다듬는데 완성본이 아닌 초안을 미리 줄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국회 회기가 시작될 때마다 공무원들이 일손을 놓은 채 여의도에 집결해야 하는 현행 시스템은 분명 문제가 있다. 내년 정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이 본격화될 경우 이 같은 비효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의원들이 자신이 만든 법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대체 누구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호기 경제부 기자 hglee@hankyung.com
A사무관이 이처럼 비효율적인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은 지난 22일 개회한 8월 임시국회 때문이다. 국회 대정부 질의가 시작되면서 그를 비롯한 상당수 공무원들의 주 업무가 '국회'로 옮겨갔다.
하지만 이 조항이 사문화된 지는 오래다. 재정부 관계자는 "48시간은커녕 전날 담당 공무원이 의원실을 방문해 질의 요지를 요청해도 당일 새벽 2~3시나,아예 현장에서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달랑 사무관이나 주무관 1명이 담당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장관이 어떻게 속속들이 알 수 있겠느냐"며 "이런 식으로 하다보면 대정부 질의 자체가 알맹이없이 흘러가게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의원들이 장관에게 어떤 분야에서 무슨 질문을 할지 모르다 보니 핵심 실 · 국 · 과장들이 일제히 국회에 진을 치는 풍경이 매년 되풀이된다. 강만수 산은금융 회장은 재정부 장관 시절 이 같은 모습을 보다못해 공식 석상에서 의원들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의원들도 나름의 할 말은 있다. 한 보좌관은 "질의 내용은 의원들 입장에서 '영업기밀'과도 같은 것"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다듬고 또 다듬는데 완성본이 아닌 초안을 미리 줄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호기 경제부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