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高 저지ㆍ경제성장 촉진 '고강도 처방전'
일본 정부가 24일 발표한 '1000억달러+?g' 기금 조성은 '엔고(高) 저지'와 '경제성장 촉진' 등의 여러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린 다목적 대책이다. 시중에 달러 수요를 늘려 엔화가치를 떨어뜨리고 해외 유망기업의 인수 · 합병(M&A)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충하겠다는 의도다. 직접적인 시장개입으로 인한 후유증을 줄이겠다는 목적도 깔려 있다. 이날 외환시장은 일단 '두고 보자'는 반응이 우세했다. 이달 말 총리가 바뀌는 등 이번 정책을 추진할 정치적 리더십이 당분간 공백인데다 민간은행들이 대출손실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경우 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 앞서는 분위기였다.

◆두 마리 토끼 잡는다

일본 정부가 조성하는 1000억달러의 기금은 시중은행 등을 거쳐 엔화 대출 형식으로 해외에 투자하려는 일본 기업에 흘러들어가게 된다. 엔화 자금을 받아든 일본 기업은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매입해 해외 투자금으로 활용한다. 자연스레 외환시장에는 엔화 공급이 늘어나고 엔화가치는 떨어질 확률이 높아진다. 일본 정부가 이번 대책을 내놓으면서 기대한 시나리오다.

엔고를 막는 동시에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도 클 것으로 일본 정부는 판단하고 있다. 1980년대 연 4%를 넘어서던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최근엔 1%대 아래로 떨어졌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내수를 통해서는 급격한 반등을 기대하기 어렵다.

답은 결국 해외에서 찾아야 하는데 최근의 엔고는 이런 해법에 큰 장애가 됐다. 일본의 7월 무역수지 흑자액은 724억엔으로 작년 같은 기간(7846억엔)보다 90.8% 감소했다.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3.3% 감소하며 무역수지 흑자폭을 줄였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이 부진한 첫 번째 이유로 '환율'을 꼽고 있다. 엔고로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바이어들이 빠져나가고 있는데다 팔아봐야 손에 쥐는 것도 얼마 없다는 얘기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일본 주요 기업 중 40%가량이 엔고를 피해 생산시설의 해외 이전을 검토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산업공동화 우려마저 높아진 것이다.

일본 정부는 해외 기업의 M&A가 일본 경제의 이런 고민을 해소할 최적의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M&A를 위한 1000억달러의 자금이 수혈될 경우 최근 들어 활기를 띠고 있는 일본 기업들의 해외 진출 시도가 더욱 힘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다.

◆발 묶인 시장개입

직접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는 점도 '1000억달러 기금'이라는 '묘수'를 꺼내들게 된 배경이다. 지난 4일 4조5000억엔에 달하는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외환시장은 시큰둥했다. 오히려 사상 최고치 경신이라는 바라지 않는 답만 돌아왔다.

두 번째 시도마저 큰 효과를 내지 못할 경우엔 시장에 내성만 키우게 되고,오히려 엔고에 불만 지르게 될 우려가 커진다. 이런 부담을 안고 시장개입을 단행하기엔 정치적 리더십이 약하다는 것도 일본 정부가 머뭇거린 요인이다. 외환정책을 총괄하는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조차 민주당 당대표 선거 결과에 따라 거취가 어떻게 바뀔지 불투명하다.

무디스가 이날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9년여 만에 떨어뜨리면서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을 통해 국채매입기금을 확대하는 방안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가뜩이나 국가부채가 많아 신용등급마저 낮아지는 판에 국채를 더욱 사들이는 정책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는 판단이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