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예술가들 출세 등용문…5전 6기로 로마大賞 차지
5년간 伊 상류문화 만끽…꿈 같은 세월을 화폭에…
창밖 풍경은 빌라 메디치 아닌 포로 로마노에서 본 앵글
간직하고 싶은 풍경을 임의대로 모자이크해 넣어
로마대상(大賞)은 예술가를 꿈꾸는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출세의 등용문이었다. 1663년 루이 14세 시대에 제정된 이 콩쿠르는 1968년 5월 학생운동을 계기로 앙드레 말로 문화부 장관에 의해 폐지되기까지 300여년간 예술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회화,조각,건축,작곡 등의 부문별 수상자에게 최고 5년간 국비 로마유학의 특전을 부여했기 때문에 국립예술학교 학생들은 저마다 여기에 목을 맸다.
로마대상 우승자라는 타이틀은 일류 작가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입상에 실패한 작가들의 좌절감도 그만큼 컸다. 우리가 잘 아는 들라크루아,모로,마네,드가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도 모두 이 콩쿠르에서 고배를 마셨다. 재수는 필수요 삼수는 선택이었다. 그 이상 도전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신고전주의 회화의 창시자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는 세 번 물먹고 나서 자살할 마음까지 먹었고 '볼레로'의 작곡가 라벨은 다섯 차례나 미역국을 마신 뒤 심사위원들의 보수성을 성토하고는 파리국립음악원에서 뛰쳐나와버렸다. 라벨보다도 더 끈질긴 집념의 소유자는 건축부문에서 여섯 번의 도전 끝에 로마대상을 거머쥔 콩스탕 무아요(1835~1911)였다.
고생 끝에 얻은 열매는 달콤했다. 무아요는 모든 예술가들이 동경해마지 않는 로마에서 꿈 같은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수상자들은 유서 깊은 메디치 가문의 빌라에 거처하면서 이탈리아 최고의 교수진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저녁이면 메디치 빌라의 책임자인 로마주재 프랑스 아카데미원장이나 로마 유지들이 개최하는 만찬과 음악회에 참석,귀족이나 누릴 수 있는 상류 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그들은 로마 근교의 캄파냐는 물론 베네치아나 피렌체,폼페이 등으로 무리지어 스케치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생활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입주 작가들은 이 행복한 세월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저마다 활짝 열린 창 밖의 로마 풍경을 배경으로 자신의 방에서 포즈를 취한 기념 초상을 그렸다. 그것은 아름다운 추억에 바치는 북받치는 찬가인 동시에 자신의 특권적인 지위에 대한 과시이기도 했다.
창 밖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실내 초상화는 독일 낭만주의 작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처음 시도한 이래 화가들이 즐겨 채택한 구도로 자리잡았다. 이런 형식의 그림에서 실내는 그림 속 주인공이 거주하는 일상적인 공간으로 아늑함과 친밀함을 상징하는 데 비해 창 밖 풍경은 불확실성 혹은 작가가 꿈꾸던 (그러나 이루지 못한) 이상을 상징한다. 화가는 이 두 가지 요소를 나란히 배열해 자신의 채워지지 않은 갈망 혹은 아쉬움을 담았다.
무아요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메디치 빌라의 입주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가 아니던가. 건축학도였지만 그림 솜씨도 남달랐던 그는 입주 3년째 되던 어느날 방에서 창 밖으로 내다 본 로마의 멋진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바야흐로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은 기운으로 물들이고 있고 저 멀리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우아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다. 왼편의 붉은 기운을 띤 성채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재위 117~138)가 세운 산탄젤로 성(城)이고 그 아래 가로 놓인 녹색 띠는 로마의 젖줄 테베레 강이다.
그러나 이 창 밖 풍경은 보르게세 공원 아래쪽에 자리한 메디치 빌라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는 사실이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정확히 말하면 '포로 로마노' 쪽에서 바라본 앵글이라고 한다. 결국 무아요는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로마의 풍경을 창 밖의 공간에 모자이크한 것이다.
뜻밖에도 그는 화폭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지 않았다. 화구와 책,그리다 만 작은 그림이 놓인 책상 앞에는 빈 의자만 달랑 놓여있다. 왜 그는 의자에 앉지 않았던 걸까. 그건 언제든 앉고 싶을 때 앉아 그곳에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는 순간 그림은 과거의 기념비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아요는 5전6기 끝에 맛본 행복감을 영원히 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이 그림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는데서 그런 속내를 읽을 수 있다 .
무아요가 이 의자를 비운 지 벌써 100년.이제 주인 잃은 이 그림은 당신의 것이다. 무아요가 위안받고 싶을 때 그랬듯이 이 의자에 앉아 노을진 로마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라.혹시 황혼으로 물든 하늘에서 무아요가 밝은 미소를 띠고 나타나 말을 걸지도 모른다. "이건 내 의자지만 당신의 의자이기도 해요. 언제든 힘겨울 때 이곳에 앉아 당신이 못 다 이룬 꿈을 이뤄보세요. "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