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주민투표는 통상 무력한 정치에 맞서 주민들이 발의하는 것으로 인식돼 있다. 지방 자치단체 대표가 주민투표를 발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만일 자치단체 대표가 투표를 발의한다면 이는 주요 정책사항을 주민들의 의견에 의존하는 것으로,리더십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주민투표는 돌파구가 없을 때 의존하는 마지막 수단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확신하기 전엔 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서울시장이 왜 차기 대통령 선거 불출마 선언을 해야 했는지,왜 시장직 사퇴를 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더욱이 투표율이 유권자의 3분의 1 미만이면 투표함을 열지 못한다는 제도는 미국엔 없다. 무려 182억원을 들인 투표함은 마땅히 열어서 그 결과를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옳다. 이는 국민의 알 권리에 해당한다. 거액을 들인 투표함을 열어 보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건 미국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쁜 투표니 하지 말라"는 말도 이상한 선거 구호다. 나쁜 법은 지키지 말자는 것과 같은 의미다. 미국에선 수십억원을 들여 어떻게든지 투표율을 올리려 애를 쓰고,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투표는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투표를 하지 말라니 미국 같으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투표를 안 하는 건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고 결국 투표 결과가 어찌 나오든 그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겠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미국에선 투표율이 아무리 낮아도 그 결과는 법적 효력을 발휘한다. 투표를 포기한 건 아예 상관 없는 걸로 계산에 넣지도 않는다.

투표한 25.7%를 제외한 유권자 가운데 과연 몇 명이 전면 무상급식을 찬성해 투표장에 안 나온 것인지,또는 몇 명이 정말 피치 못할 사정으로 투표장에 못 나온 것인지도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투표장에 안 가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서 투표한 사람이 3분의 1이 안 되면 아예 선거 자체가 무효가 된다는 것은 잘못됐다.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찬성이 있어야 통과된다는 규정은 의회나 이사회 같은 데 적용되는 것일 뿐 주민투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3분의 1이든 4분의 1이든 투표함은 반드시 열어야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이상한 주민투표법은 하루빨리 개정해야 한다.

아무튼 이번 주민투표는 마치 '나는 가수다' 라는 한 편의 숨막히는 쇼를 보는 것 같았다.

미 캘리포니아에서는 1978년 처음으로 주민들이 발의한 역사적인 투표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Proposition 13'이다. 투표는 주택에 대한 부동산세를 1975년으로 돌려놓고 그 때부터 해마다 2% 이상 올릴 수 없도록 못박은 주민 법안을 대상으로 치러졌다. 주 의회와 주지사의 무력함에 반발해서 나온 이 주민투표의 결과는 압도적인 찬성(64.8%)이었다.

투표율이 유권자의 3분의 1이 안 되면 무효란 규정은 당연히 없었다. 중요한 것은 몇 명이 투표했는지 여부였을 뿐 몇 명이 투표에 불참했는지는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다.

김창준 < 전 미국 연방하원의원 / 한국경제신문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