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칼럼] 대기업 여성 CEO 탄생의 조건
'당신과 그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해도/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 '서른,잔치는 끝났다'로 알려진 최영미 씨의 '권위란'이란 시(詩)다. 짤막하지만 적확하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여성도 사장이 돼야 한다"는 한 마디가 우리 사회에 일으킨 파장만 봐도 그렇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란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남학생을 앞지르고,기업 공공기관 할 것 없이 시험을 치르는 곳마다 상위권은 몽땅 여성이란 마당에 '여성도 사장이 돼야 한다'는 원론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그의 언급 한 번에 이 땅 여성은 물론 딸을 둔 아버지들까지 한껏 고무됐다.

삼성이 이렇게 나오면 싫든 좋든 다른 곳에서도 신경을 쓸 테고,그러다 보면 머지않아 대기업에서 오너 가족이 아닌 여성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할지 모른다. 일각에선 오는 연말 삼성그룹 정기 인사에서 비오너 출신 여성 CEO가 배출되는 것 아니냐는 예측까지 나온다. 임원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여성 CEO는 수직적이고 하드웨어 위주의 기업문화 자체를 뒤바꾸고 그럼으로써 종래와 전혀 다른 새로운 경쟁력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 중심적 풍토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배출된 여성 CEO가 겪을 고충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만에 하나 기대한 성과에 조금이라도 못 미치면 여기저기서"그것 봐라"할 테고 여성 CEO 배출은 다시 한동안 미뤄질 수도 있다. 여성 CEO가 자리잡으려면 먼저 후보군인 임원진이 늘어나야 하고,그러자면 부장 · 팀장급이 확실하게 포진하고 있어야 한다. 사원으로 입사,대리 · 과장으로 승진하는 여성층이 두터워져야 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대기업과 직원 100명 이상 중소기업을 통틀어 여성 비율은 사원급 38.4%,대리급 25%,과장급 16.1%,부장급 10%라는 게 국내 현실이다. 대리부터 확 줄고,과장급은 사원의 절반도 안 된다. 육아 부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승진이나 승급 시의 차별 탓이 크다. 차별은 단순히 여성이어서라기보다 보직 탓일 가능성이 높다. 잦은 야근 등 업무 강도는 결코 덜하지 않은데도 여성이란 이유로 지원 부서에 배치,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똑같이 입사했음에도 불구,대리 승진에서 동기 남성에 밀린 여성들은 자존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직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떠나는 수가 많다.

이들은 스펙 보강 후 국내 기업에 취업하기도 하지만 상당수가 여성 차별이 적은 외국계 기업으로 옮긴다. 결국 2010년 말 기준으로 직원 1000명 이상 대기업 임원급 중 여성은 4.7%에 불과하다. 여성 임원이 39.5%라는 노르웨이는 물론 미국(15.7%)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임원이 못 되니 사장은 언감생심,꿈도 못 꾼다.

물론 여성의 승진을 막는 게 남성중심적 기업문화만은 아닐 것이다. '직장에서 어디까지 승진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CEO'라고 답한 여성(22.6%)이 남성(46.2%)의 절반도 안 됐다는 조사 결과에서 보듯 도전을 두려워하는 여성 스스로의 태도가 걸림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실력과 의욕,용기를 갖추고 거침없이 꿈꾸던 사람도 '여자라서' '남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식의 대우에 좌절하다 보면 기가 꺾이고 풀이 죽는다.

삼성의 여성 사장 배출은 여성들에게 희망과 비전이 될 게 분명하지만,그보다 남녀의 근본적인 차이에 대한 지속적이고 전사적인 교육과 경력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보직 제공,대리 · 과장 승진 시의 차별 철폐가 선행돼야 한다.

여성들 역시 칼리 피오리나 전(前) 휴렛팩커드 회장이 제시한 리더의 덕목을 명심할 일이다. "모든 관리자가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경쟁력 · 인격 · 파트너십을 갖출 때만 리더로 정해진다. 경쟁력 있는 사람은 많지만 인격을 겸비한 사람은 적고,다른 사람의 효율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

박성희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