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5시간·직장선 10시간
업무 협조부터 상사 뒷담화까지 집에선 못할 얘기도 호흡 '척척'
'카더라 통신' 단골 먹잇감
회식 후 한 두번 바래다 줬다가 곳곳서 수군수군 '의혹의 눈길'
'사랑과 우정 사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대략 10시간 안팎,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5시간 안팎.같은 부서 옆자리 여직원과 보내는 시간이 아내와 있는 시간보다 두 배가량 많은 게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현실이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다. 지난해 개봉한 미국 영화 '라스트 나잇'에서 남편의 직장 동료 때문에 위기를 맞은 부부의 얘기는 '오피스 스파우즈(office spouse · 사내에서 배우자처럼 절친한 남녀사이)'에 얽힌 해프닝과 사고가 얼마나 '범 세계적'인 현상인지를 보여준다.
오피스 스파우즈에 대한 '김과장 이대리팀'의 취재는 '남녀 사이에도 우정이 가능한가'라는 고전적 질문에서 시작했다. 직장 내에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는 이성관계가 가능하냐는 것이다. 한 결혼정보업체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젊은 직장인 절반가량이 오피스 스파우즈가 있다고 한다. 때로는 동성보다 쿨한 업무 파트너가 되기도 하지만,서로의 애인 얘기를 할 때면 다소 서먹해지는 그들.과연 동료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관계일까.
◆공공의 적 앞에 뭉치다보니 어느 새 절친
모 대기업 계열 종합상사의 해외영업 부문에서 일하는 박모 대리(33 · 남).그는 지난해 입사한 이모 사원(27 · 여)과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다 친해졌다. 박 대리는 이씨의 '사수'를 맡아 회사생활 적응은 물론 엑셀 등 컴퓨터 사용법 등을 친절히 가르쳐 줬다. 이씨는 해외 공문 작성 등을 도와주며 박 대리가 상대적으로 약한 외국어에 보탬을 줬다. 물론 그들은 "서로가 쿨하다"고 말한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회를 맡아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유재석,김원희와 비슷한 관계"라고 비유했다.
직장인들 사이의 메신저도 오피스 스파우즈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메신저로 상사의 뒷담화를 하다 서로 속내를 털어놓게 된 모 유통회사의 정모 과장(36 · 남)과 김모 대리(31 · 여)가 단적인 예다. 이들이 근무하는 총무부의 송 부장은 부하직원을 몰아붙이기로 악명이 높은 상사.이들은 상대방이 송 부장에게 '깨지고' 올 때마다 조용히 메신저로 서로를 위로해주고 부장에 대한 불만을 털어놨다. 정 과장은 "특별히 업무 연관성도 없고 이전에는 사적으로 대화 나눌 기회도 없었지만 메신저로 한두 마디씩 주고 받다보니 사적인 이야기까지 하는 사이가 됐다"고 전했다.
◆퇴근 후 보내는 문자는 위험
오피스 스파우즈는 업무 효율을 높여주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일에 대한 긴장감이 높아지고,힘든 회사 생활에 자양분 같은 힘을 주기도 한다. 물론 지나치면 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연애감정이 싹터 업무는 뒷전이 되고,회사는 데이트 장소가 된다. 기혼자들은 불륜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의류업체의 김모 과장(35)은 "오피스 스파우즈와의 관계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라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회사에선 사적인 고민까지 털어놓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지만 퇴근하면 문자 한 통 주고 받지 않는다. 김 과장은 "퇴근 후에도 이런저런 연락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상대방에게도 뚜렷한 신호를 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오피스 스파우즈들이 퇴근 후 업무 상 보내는 문자나 전화가 기혼자들에게는 부부싸움의 빌미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틀어지면 오히려 더욱 더 먼 사이
심적으로는 물론 업무에도 도움이 되는 오피스 스파우즈지만 사이가 틀어지면 회사 생활을 더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출판사를 다니는 김모 대리(31)는 자신의 2년 선배인 여자 과장과 벌써 다섯 달 가까이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회사에서 공인된 오피스 스파우즈였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해당 상사가 자신의 뒷담화를 윗사람에게 하고 다녔던 것.김 대리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믿고 의지했던 상사가 그런 말을 하고 다녀 상처가 더 컸다"며 "같은 부서에서 일하다보니 서로 불편한 상태"라고 털어놨다.
오피스 스파우즈는 사내 루머 정보망인 '카더라 통신'의 대표적인 먹잇감이다. 재작년 광고회사에 입사한 정모 사원(26 · 여)은 회사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은 하모 대리(31 · 남)와 같은 업무를 맡게 됐다. 서로 관심사가 비슷하다보니 한층 가까워졌지만 정씨는 유부남인 하 대리가 이성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내에서 던지는 의혹의 눈길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정씨는 "한번은 해외출장을 떠나는 길에 하 대리가 회사 차로 공항까지 바래다준다며 따라나서자 뒤통수에 무수한 의혹의 시선이 꽂혔다"고 말했다.
◆애인의 직장동료 얘기에 '부글'
대형 전자업체에 다니는 강모 대리(32)는 요새 여자친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여자친구가 만날 때마다 다니는 회사의 남자 동료 칭찬을 늘어놓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친구가 '그놈' 칭찬을 할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강씨도 여자친구에 대한 이 같은 고민을 절친한 팀 여성 후배인 윤모씨와 상의한다.
중견 건설사에 다니는 김모 과장(35)은 오피스 스파우즈에 대한 기사가 실릴 때마다 아내에게 해명하기 바쁘다. 아내가 "당신도 회사에 이런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캐묻곤 하기 때문.김 과장은 "남자만 우글우글한 건설사에 여직원이 있어야 오피스 스파우즈 비슷한 것이라도 있지 않겠냐"며 "관련 기사가 신문이나 인터넷에 게재될 때마다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다"고 말했다.
노경목/강유현/강경민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