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돌풍'에 여론조사도 시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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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Story - 변화무쌍 '민심 나침반'…과신은 금물
여론조사 20% 앞선 오세훈, 뚜껑 여니 0.6%P 차이
당락 뒤바뀐 출구조사 속출…아예 조사 포기하기도
여론조사 20% 앞선 오세훈, 뚜껑 여니 0.6%P 차이
당락 뒤바뀐 출구조사 속출…아예 조사 포기하기도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서울시장 출마를 공식화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40%에 육박하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안 원장의 이 같은 지지율이 실제 '10 · 26 보궐선거'까지 이어질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과거 각종 선거는 막판까지 숱한 변수로 인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경우가 다반사였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 땐 오세훈 후보가 등장하면서 지지율 1위를 끝까지 지켰다. 2007년 대선 때도 이명박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 지지율 1위를 유지한 끝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그렇지만 초반 대세론이 꺾인 사례도 적지 않다. 박찬종 전 의원은 1995년 6월27일 민선 1기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를 불과 20일가량 앞둔 시점까지 40% 안팎의 지지율로 1위를 지켰지만,실제 선거에선 33.5%를 얻어 조순 민주당 후보(42.4%)에게 패했다. TV토론이 결정적이었다. 포청천 이미지를 내세운 조 후보의 신뢰 이미지가 먹히면서 불과 선거를 1주일여 앞두고 막판 대역전극이 펼쳐진 것이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무균질' 이미지를 앞세운 박 전 의원은 1997년 초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30% 안팎의 지지율로 여야를 통틀어 선두를 달렸지만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이회창 후보가 대표직을 맡으면서 당내 지지세를 결집한 반면 박 전 의원은 세 확산에 실패,레이스를 중도 포기했다.
여론조사 1위 바통을 이어받은 이 후보도 아들 병역 문제로 가로막혀 결국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16대 대선을 1년가량 앞둔 2001년 하반기.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40%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어떤 인물과 상대해도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듬해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노풍'을 일으키면서 대선 판세가 요동쳤고,결국 노 후보의 역전 드라마로 끝이 났다. 2006년엔 청렴 이미지의 고건 전 국무총리가 17대 대선 주자 중 30% 안팎의 지지율로 선두를 달렸지만 조직의 열세로 이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여론조사가 빗나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출구조사를 포기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선 오세훈 전 시장이 투표일 1주일 전 여론조사에서 20%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차이는 0.6%포인트에 불과했다.
2008년 18대 총선 땐 당락이 뒤바뀐 출구조사 결과가 속출했다. 오차가 20%포인트까지 벌어진 적도 있다. 정치권에서 "여론조사를 여론조사해야 할 판"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나온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선거는 개인과 조직의 조그만 변수에도 흐름이 일거에 뒤바뀌는 만큼 지지율 대세론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론조사 자체의 문제점도 제기된다. 응답률이 낮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때문에 여론조사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
과거 각종 선거는 막판까지 숱한 변수로 인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경우가 다반사였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 땐 오세훈 후보가 등장하면서 지지율 1위를 끝까지 지켰다. 2007년 대선 때도 이명박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 지지율 1위를 유지한 끝에 대권을 거머쥐었다.
그렇지만 초반 대세론이 꺾인 사례도 적지 않다. 박찬종 전 의원은 1995년 6월27일 민선 1기 서울시장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를 불과 20일가량 앞둔 시점까지 40% 안팎의 지지율로 1위를 지켰지만,실제 선거에선 33.5%를 얻어 조순 민주당 후보(42.4%)에게 패했다. TV토론이 결정적이었다. 포청천 이미지를 내세운 조 후보의 신뢰 이미지가 먹히면서 불과 선거를 1주일여 앞두고 막판 대역전극이 펼쳐진 것이다.
15대 대선을 앞두고 '무균질' 이미지를 앞세운 박 전 의원은 1997년 초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30% 안팎의 지지율로 여야를 통틀어 선두를 달렸지만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이회창 후보가 대표직을 맡으면서 당내 지지세를 결집한 반면 박 전 의원은 세 확산에 실패,레이스를 중도 포기했다.
여론조사 1위 바통을 이어받은 이 후보도 아들 병역 문제로 가로막혀 결국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16대 대선을 1년가량 앞둔 2001년 하반기.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40%가 넘는 지지율을 얻으며 어떤 인물과 상대해도 승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듬해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노풍'을 일으키면서 대선 판세가 요동쳤고,결국 노 후보의 역전 드라마로 끝이 났다. 2006년엔 청렴 이미지의 고건 전 국무총리가 17대 대선 주자 중 30% 안팎의 지지율로 선두를 달렸지만 조직의 열세로 이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여론조사가 빗나가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출구조사를 포기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선 오세훈 전 시장이 투표일 1주일 전 여론조사에서 20%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나 실제 차이는 0.6%포인트에 불과했다.
2008년 18대 총선 땐 당락이 뒤바뀐 출구조사 결과가 속출했다. 오차가 20%포인트까지 벌어진 적도 있다. 정치권에서 "여론조사를 여론조사해야 할 판"이라는 자조 섞인 얘기까지 나온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선거는 개인과 조직의 조그만 변수에도 흐름이 일거에 뒤바뀌는 만큼 지지율 대세론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론조사 자체의 문제점도 제기된다. 응답률이 낮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때문에 여론조사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