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 수 있었던 건 미술을 방패 삼아 병과 투쟁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비극의 예술과 오랜시간 동거했다. "(야요이 구사마)

아시아의 대표 '여걸' 화가 구사마 야요이(82)의 조형미학론이다. 그는 평생 환각증세를 겪으며 물방울과 그물망의 반복 · 확산을 통해 무한대의 환상적 세계를 개척했다. 그와 미국 유럽에서 활동하는 이수경(48),진신(40),미야나가 아이코(37) 등 여성 작가 4명이 서울에서 뭉쳤다.

이들은 '반복의 서사시(Epic of Units)'라는 제목으로 사간동 갤러리 현대 신관 전시장에 근작 70여점을 내걸었다. 단순한 반복의 미학을 넘어 '치유의 힘'까지 포괄하는 작품들이 관심을 모은다. 특정 단위의 지속적인 반복에서는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여성 특유의 감수성도 엿보인다.

스페인 스레이나 소피아미술관과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회고전을 갖고 있는 구사마 야요이는 생물형태적 추상으로 시작해 점차 그물 모양의 물방울 무늬로 화면 전체를 덮은 대작 '무한망(Infinity Nets)'시리즈 4~5점을 내놓았다.

청량한 물방울 무늬의 반복과 확산은 작가의 환각 증세에서 나온 것이다. 어릴 때부터 정신질환을 겪은 그는 예술을 삶의 원천으로 삼았다. 여든살을 넘은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는 1973년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 도널드 저드,앤디 워홀,프랑크 스텔라 등 현대미술 대가들과 교류하며 뉴욕 아방가르드 예술을 이끌었다.

내년 6월 시드니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이수경 씨는 깨진 도자기 파편을 에폭시와 금박으로 제작한 '번역된 도자기' 시리즈를 들고 나왔다. 그는 "파편들을 하나 하나 모아 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 작가 진신 씨는 트로피,복권,열쇠,약병,옷 등 일상에서 버려진 오브제에 현대인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잃어버린 비스타'는 황동열쇠 8000개를 이어 붙인 설치작품.아리조나 광산에서 생산된 구리로 만들었다.

미야나가 아이코는 나프탈렌과 소금을 소재로 일본과 아시아 화단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공기 중에 승화되는 나프탈렌의 특성을 활용해 생성과 소멸의 순간을 시각 예술로 잡아낸다. 전시가 진행될수록 작품의 형태가 사라지는 과정이 흥미롭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도형태 갤러리 현대 대표는 "반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각기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치는 아시아계 대표 여성 작가들을 모았다"며 "생성과 치유의 미학을 발견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