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촛불 켜지 않았더니/ 낭군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향긋한 숨소리만 듣다가/ 아침에 거울 보고 하는 말/ 어찌하여 뺨에 바른 연지가 낭군 얼굴에 가득 묻었나요. '

섣달 긴긴 밤, 신혼의 사랑 노래가 농염하다. 조선 말 문인 이안중의 문집 《현동집(玄同集)》에 실린 '달거리 노래'(12월)의 사랑 묘사다. 이안중은 신혼의 즐거움을 열두 달로 나눠 참 운치있게 읊었다. 부부가 살을 맞대고 사는 거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사랑만으로 부부생활이 유지되지는 않는 법.조선시대엔 오륜(五倫)의 윤리 중 부부유별(夫婦有別)이 부부 사이를 규정했다. 그런데 이 부부유별의 의미가 복합적이라고 한다.

"남자는 바깥일,여자는 안살림으로 나누는 정도가 아닙니다. 요즘말로 하면 '스와핑'하지 말라, 밖에 나가 바람피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죠."

이종묵 교수(50 ·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의 설명이 뜻밖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며 어릴 적부터 남녀상열지사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려던 조선시대가 아닌가.

"실제로 사고가 많이 났던 것 같아요.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이 왜 생겼겠어요. 부부유별을 강조한 건 또 뭔가요. 역설적으로 자유연애로 인한 사고가 적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던 겁니다. 부부유별이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윤리에도 연결돼 있거든요. "

이 교수는 새책 《부부》(문학동네,308쪽,1만3800원)를 통해 조선시대 다양한 부부의 모습을 펼쳐보인다. 각종 문헌과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부부가 어떻게 살았고,부부의 문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치밀하게 살폈다.

그는 조선시대에 나라가 혼사에 관여한 일도 얘기한다. 1791년 2월 정조는 한양의 노총각과 노처녀의 혼인을 서두르도록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가난해서 혼기를 놓친 젊은이들을 위해 관아에서 혼인비용으로 쓸 돈 500전과 포목 두필을 대주고 달마다 보고하게 했다. 이덕무에게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도록 해 '김신부부전'이 쓰였고,재기발랄한 문사 이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 작품 '동상기'를 내놓았다.

"남녀 음양이 조화가 잘 이뤄져야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생기지 않는다고 여겼던 겁니다. 남효온이 단종의 어머니로 폐위된 덕현왕후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에서도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가장 먼저 든 게 혼인 문제였죠.혼인이 만사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

안사람들의 내조에 대한 얘기도 새롭다. 그는 "조선시대 있는 집안 여성들은 공부를 굉장히 많이 했다"며 "사서삼경쯤은 줄줄 외울 정도였다"고 했다. 규장각에 당나라 한시 수백 수가 한글로 번역돼 있는 데 이는 당시 여성의 교양수준이 해외에까지 미친 증거라는 설명이다.

"부인이 남편을 바르게 이끄는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남편이 쓴 글을 비평도 하고요. 조선 후기 여성학자인 강정일당 같은 이는 남편의 글을 대신 써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죠."

함께 살다보면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 같다. 이덕무가 '사소절'에서 언급한 대로 자존심,가난,남편의 외도 등 요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로 마찰을 빚었다. 부부간 갈등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서 책임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상대의 잘못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의 행실을 돌아봐 반성하는 것이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길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배울 점은 각자가 찾는 것이지요.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것까지가 제 역할이에요. 굳이 꼽자면 부부 서로가 더 많은 배려를 해야한다고 할까요. 사랑하지 말고 공경하라는 말도 할 수 있겠네요. 사랑은 빨리 식습니다. 서로가 손님처럼 공경할 때 관계가 더 오래 유지되는 법이죠."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