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믿겠다. 우리 것부터 먼저 표결하자."9일 국회 본회의가 여야의 기싸움으로 파행을 빚었다. 이날 국회는 양승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조용환 헌법재판관 선출안 등을 표결할 예정이었으나 처리 순서를 두고 기싸움을 벌이다 민주당이 집단 퇴장하면서 16건의 안건을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 당초 여야는 양 대법원장과 조 재판관 후보자안을 동시에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박희태 국회의장이 양 대법원장 후보자가 3부 요인임을 들어 별도 사안으로 분류,먼저 처리하자고 제안하면서 소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한나라당 의원들도 동의하고 나서자 민주당은 "진보 인사라고 조 후보자의 선출안 처리를 두 달 넘게 반대해온 한나라당이 여야 원내대표 간 합의를 무시하고 꼼수를 부리려 한다"며 집단 퇴장했다.

민주당은 갑작스런 분리 처리 배경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민주당 추천 인사인 조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6월28일 열렸다. 그렇지만 한나라당이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만 직접 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다"는 청문회 발언을 문제삼으면서 조 후보자의 선출안은 2개월 넘도록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이날 의총에서는 조 후보자에 대해 "절대로 안 된다"는 발언들이 쏟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원내 관계자는 "선출안이 통과되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층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역풍을 우려했다.

지난 8일 열린 양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 보고서를 민주당이 이례적으로 여야 합의로 처리해준 데는 이 같은 한나라당 일각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했다. 대신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이날 본회의에서 양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일괄로 처리하고 권고적 당론으로 한나라당 의원들의 찬성을 독려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황 원내대표가 자율투표 방침으로 돌아선 게 사실상 선출안 반대를 용인한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이 집단 퇴장한 것은 양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통과 이후 조 후보자 선출안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부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결국 여야 원내대표끼리의 약속조차 믿지 못하는 '불신의 정치'가 이날 본회의를 파행으로 몰고간 셈이다. 양당은 오는 15~16일 본회의를 재소집해 두 안건을 상정하기로 했지만 정기국회 초반부터 여야의 힘겨루기로 정국이 경색국면을 맞고 있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