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42번가와 6번 애비뉴에 위치한 뱅크오브아메리카(BoA)타워 내 메릴린치 트레이딩 룸.평소 같으면 왁자지껄할 이곳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정적에 싸여 있었다. 책상 위의 전화기가 울리자 한 트레이더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해고를 통보하는 전화다. 다른 트레이더들의 얼굴엔 안도와 미안함이 교차했다.

모건스탠리의 한 직원은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지 3년이 지난 현재 월스트리트에선 2008년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금융위기를 촉발시켰던 부실 모기지(주택담보대출)는 여전히 월스트리트를 옥죄고 있다. BoA는 아직도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부실 모기지증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 직원은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모기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며 "3년 전과 비교할 때 펀더멘털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으며 제2의 리먼사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중앙은행(Fed) 등 금융당국은 제2의 리먼사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지난 봄부터 주요 은행들을 상대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해왔다.

월스트리트의 한 사모펀드 관계자는 "2008년에도 주가가 폭락하자 정부가 공매도를 금지했고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 등으로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려 했다"며 "지난 8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4470억달러의 경기부양책을 내놓은 장면은 정확히 3년 전을 연상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이 바닥을 칠 무렵 국부펀드가 들어왔다는 점도 3년 전과 비슷하다"며 "12일 중국투자공사(CIC)의 이탈리아 국채 매입 소식이 바닥을 의미하는 신호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하지만 "2008년에는 미국만의 문제여서 달러를 찍어내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 유럽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며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금융위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앞으로도 5년에서 7년은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3년 사이 월스트리트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정부 규제가 강화됐다는 것이다. 금융회사들의 가장 큰 수익모델이었던 자기자본매매(prop trading)나 차입(leverage) 투자를 못하게 된 점이 대표적이다. 성장성과 수익성이 모두 떨어져 미국 주요 은행의 주가는 최근 다른 업종에 비해 훨씬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CNBC 앵커인 마리아 바티로모는 "미국은 의류,자동차는 물론 맨홀 뚜껑까지 수입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금융이라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수출상품이 있었다"며 "규제 강화로 금융마저 뒤처지게 되면 미국의 경제 성장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