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아버지,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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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지났다. 올해도 거리로 쏟아지는 수많은 귀성객들을 보며,한편으론 아무데도 가실 곳 없어 하릴없이 집 주변을 서성거리시는 내 아버지를 지켜봤다. 이제 90세가 다 되신 노인의 초라한 어깨와 굽은 허리에 가을 햇빛이 무심히 내려와 꽂혔다.
나는 실향민의 자식이다. 말 그대로 맨주먹에 붉은 피밖에는 가진 게 없었던,그래서 이 세상의 삶이 그리도 서럽고 지난했던,그러나 삶에 대한 의지만큼은 우직하고 올곧았던 60여년 전 서북 청년이 이 땅에 남겨놓은 흔적이 바로 나다.
10여년 전 회사일로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평양에서 묘향산 관광을 다녀오다 보면 평북 영변군을 지나게 된다. 김소월 시인이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라고 읊었던,지금은 북한의 핵시설 때문에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그곳이 내 아버지의 고향이다. 말로만 듣던 고향 동네를 지나오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자그마한 돌멩이 두 개를 주워다 드렸다. 시큰둥해하시는 것 같아 어디 버리셨겠지 했는데 당신의 침대 밑에 고이 두시고는 가끔 꺼내 만져보신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어찌나 가슴이 뭉클하고 아리던지….
수년 전 북한과의 관계가 시끄러울 때 "이번에 만일 다시 전쟁이 난다면 나는 차라리 내 인생을 스스로 끝내고 말련다. 인간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하면 평생에 세 번 전쟁을 겪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당신 세대의 운명을 한탄하셨다. 이미 겪은 두 번의 전쟁은 세계 2차대전과 6 · 25전쟁이다. 혈혈단신 월남길에 잃어버린 것은 얼마나 많았을까. 젊은 날 청천강(평북을 가로지르는 강) 푸른물에 많은 꿈과 열정을 띄웠을 터인데….불행한 조국과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그저 묻어둘 수밖에 없어 굵은 눈물방울을 수없이 흘렸을 터이다. "곧 돌아오마"란 말만 남기고 영영 남이 되어버린 북에 두고 온 사랑하는 처자도 있었을 거다. 그래서 평생 전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벼려둔 사랑의 말을 이제껏 흐릿한 문신처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그들은 전쟁과 사상과 일상의 궁핍에 찌들었으면서도 사랑하는 처자식을 위해 그리고 남루하지만 소중한 이 사회를 위해 무한희생을 강요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우리의 아버지다. 그러면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들의 인생이 그토록 무참히 차압당한 데 대해 소송이라도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체 누구를 상대로 소송해야 할까? 신(神)을? 국가를? 위정자들을? 하지만 그러한 것으로 완전하게 운명을 보상받을 수는 없기에 그들은 좌절하고 숨죽여 통곡하고 있다.
이제 우리 아버지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일생의 마지막이 될 성싶은 시기를 조용히 보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바쁜 일상을 핑계로,인간 역사를 통틀어 보면 지극히 '사소한 권력'을 가졌다고 으스대며 그들의 굴곡진 삶과 신산했던 일생을 조금도 위로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 돌아보자.이들이 편히 가실 수 있게 무엇이라도 해보자.그들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을….우리 아버지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그제서야 이들의 쿰쿰한 체취가 사무치게 그리워지지 않을까.
한지훈 < 이노패스인터내셔널 대표 jhhan@innopathintl.com >
나는 실향민의 자식이다. 말 그대로 맨주먹에 붉은 피밖에는 가진 게 없었던,그래서 이 세상의 삶이 그리도 서럽고 지난했던,그러나 삶에 대한 의지만큼은 우직하고 올곧았던 60여년 전 서북 청년이 이 땅에 남겨놓은 흔적이 바로 나다.
10여년 전 회사일로 평양을 방문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평양에서 묘향산 관광을 다녀오다 보면 평북 영변군을 지나게 된다. 김소월 시인이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이라고 읊었던,지금은 북한의 핵시설 때문에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그곳이 내 아버지의 고향이다. 말로만 듣던 고향 동네를 지나오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자그마한 돌멩이 두 개를 주워다 드렸다. 시큰둥해하시는 것 같아 어디 버리셨겠지 했는데 당신의 침대 밑에 고이 두시고는 가끔 꺼내 만져보신다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어찌나 가슴이 뭉클하고 아리던지….
수년 전 북한과의 관계가 시끄러울 때 "이번에 만일 다시 전쟁이 난다면 나는 차라리 내 인생을 스스로 끝내고 말련다. 인간의 운명이 얼마나 기구하면 평생에 세 번 전쟁을 겪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당신 세대의 운명을 한탄하셨다. 이미 겪은 두 번의 전쟁은 세계 2차대전과 6 · 25전쟁이다. 혈혈단신 월남길에 잃어버린 것은 얼마나 많았을까. 젊은 날 청천강(평북을 가로지르는 강) 푸른물에 많은 꿈과 열정을 띄웠을 터인데….불행한 조국과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그저 묻어둘 수밖에 없어 굵은 눈물방울을 수없이 흘렸을 터이다. "곧 돌아오마"란 말만 남기고 영영 남이 되어버린 북에 두고 온 사랑하는 처자도 있었을 거다. 그래서 평생 전하지 못하고 가슴속에 벼려둔 사랑의 말을 이제껏 흐릿한 문신처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그들은 전쟁과 사상과 일상의 궁핍에 찌들었으면서도 사랑하는 처자식을 위해 그리고 남루하지만 소중한 이 사회를 위해 무한희생을 강요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우리의 아버지다. 그러면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들의 인생이 그토록 무참히 차압당한 데 대해 소송이라도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체 누구를 상대로 소송해야 할까? 신(神)을? 국가를? 위정자들을? 하지만 그러한 것으로 완전하게 운명을 보상받을 수는 없기에 그들은 좌절하고 숨죽여 통곡하고 있다.
이제 우리 아버지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일생의 마지막이 될 성싶은 시기를 조용히 보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바쁜 일상을 핑계로,인간 역사를 통틀어 보면 지극히 '사소한 권력'을 가졌다고 으스대며 그들의 굴곡진 삶과 신산했던 일생을 조금도 위로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 돌아보자.이들이 편히 가실 수 있게 무엇이라도 해보자.그들의 희생과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것을….우리 아버지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그제서야 이들의 쿰쿰한 체취가 사무치게 그리워지지 않을까.
한지훈 < 이노패스인터내셔널 대표 jhhan@innopathint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