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곳곳에 위기론이 넘쳐난다. 신년사,회사 워크숍 등에 꼭 들어가는 대표 메뉴가 된 지 오래요,주변 곳곳에서 온갖 위기들이 우리를 주눅들게 한다. 매번 내용만 살짝 바뀐 위기론에 겁을 먹다 보면 오히려 현실에서 멍하니 분리되는 듯한 느낌마저 받게 된다. 현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픈 '회피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 전 심장이 뛰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삶에 대한 의욕이 없다며 60세 남성 한 분이 클리닉을 찾아왔다. 강직한 인상에 속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직장 생활을 'FM'대로 한다는 게 얼굴에 써 있었다.

'억울한 감정이 있어 보이세요'라는 질문에 그는 "정말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내 회사라 생각하고 회사의 생존을 위해 제 개인사를 희생하고 살아왔는데 억울합니다. 과거 회사 합병 등 여태껏 한 일들이 지금 법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불안한 상황입니다"고 답했다. 깊은 한숨이 의사인 내 가슴도 답답하게 했다. 센 스트레스가 나쁠 것 같지만 사실은 미적지근하나 오래 가는 만성 스트레스가 정신건강에 더 좋지 않다.

회사 조직의 위기론을 떠나 우리는 스스로를 위기론으로 채찍질하고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문을 외운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보자.각자의 인생에 위기가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클리닉을 찾아오는 수 많은 분들,다른 사람은 모르는 고충이 다들 있다. 사실 걱정거리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인생은 비극이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그것을 억지로 빠져 나오겠다고 위기론을 앞세워 자신을 혹사시키는 데 있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고갈되면 현실을 떠나 어디론가 회피하고 싶어진다. 사람을 만나기 싫은 증상이 나에게 요즘 생겼다면 심리적 회피 현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한 주가 나에게 남은 마지막 주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자문이 도움이 된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행복이지,생존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1주일에 한 가지 정도는 이번주가 마지막이라면 하고픈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심리적 회피 반응에 대한 행동 활성화전략이다.

윤대현 <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