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의 한국정치 미국정치] 안철수와 로스 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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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돌발한 안철수 바람은 한국 정치권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본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는 서울시장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50%를 넘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국민들을 놀라게 했고,자신보다 지지율이 훨씬 낮은 시민운동가 박원순 씨와 만나 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서울시장 불출마를 공언해 다시 한 번 놀라움을 안겨줬다. 국민이 기존의 정치권에 얼마나 실망해 있는지,또 새롭고 참신한 인물의 출현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안 교수가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 것은 내년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내년 대선까지 남은 1년여 기간 동안 안 교수가 현재의 경이로운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국민적 기대주로 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지금까지의 안철수는 정치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청춘 콘서트' 행사에서 만나본 안철수지만 대통령선거에 뛰어들면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국민적 시선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당장 여러 가지 흠집내기가 시작될 것이다.
여기서 안 교수처럼 미국 정치에 한때 새 바람을 불어넣는 참신한 인물로 기대를 모았던 기업가 로스 페로의 사례를 보자.페로는 미국 100대 부자다. 그런 그가 1992년 2월 성공적인 기업가의 이미지와 능력을 앞세워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기성 정치인들에게 대한 실망과 혐오증이 고조됐을 때였다.
기존 정치권은 너무도 무능한 집단이며,나라의 장래보다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집단이라고 비난하는 페로의 혜성 같은 등장은 하루아침에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페로는 이후 자신을 중도주의자로 강조하면서 미국의 재건을 부르짖었다. 낙태 자유,총기규제를 지지하는 전통적인 진보적 이념과 환경보호청(EPA)을 없애자는 보수적 이념도 함께 내세웠다. 그의 지지율은 한때 39%를 넘었다. 당시 부시는 31%,클린턴은 25%였다.
하지만 기업에서 성공한 최고 경영자들의 공통점인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 페로의 성격이 문제였다. 결국 그의 인기는 25%로 떨어졌다. 페로의 진짜 몰락은 첫 번째 대통령 후보 토론 때였다. 페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터라 시청률은 매우 높았다. 이 토론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반대하는 페로의 논리는 궁색했다. 그 당시 57%의 미국 여론이 NAFTA를 지지했다. 결국 경험 많은 부시와 그동안 정치판에서 세련된 클린턴 앞에서 너무도 초라한 모습을 보여 그의 인기는 한방에 39%에서 7.9%로 하락했다. 페로를 성공한 기업가로 볼 때와 미국 최고지도자인 대통령 후보로 봤을 때와는 너무도 차이가 컸던 것이다. 결국 1992년 대통령의 꿈은 18.9% 득표로 좌절됐다. 1912년 이후 최초로 나온 제3당 후보는 이렇게 사라졌다. 페로는 1995년에 개혁당 후보로 대통령에 다시 출마했지만 후보 간 토론조차 끼지 못한 채 낙마했다.
정치 싸움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참신한 인물을 갈망하지만 막상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안 교수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궁금하다. 정치에 경험이 전혀 없이,정치판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에 출마하는 건 위험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리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김창준 전 미국 연방하원의원 / 한국경제신문 고문
안 교수가 서울시장 출마를 포기한 것은 내년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내년 대선까지 남은 1년여 기간 동안 안 교수가 현재의 경이로운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국민적 기대주로 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지금까지의 안철수는 정치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청춘 콘서트' 행사에서 만나본 안철수지만 대통령선거에 뛰어들면 정치인 안철수에 대한 국민적 시선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당장 여러 가지 흠집내기가 시작될 것이다.
여기서 안 교수처럼 미국 정치에 한때 새 바람을 불어넣는 참신한 인물로 기대를 모았던 기업가 로스 페로의 사례를 보자.페로는 미국 100대 부자다. 그런 그가 1992년 2월 성공적인 기업가의 이미지와 능력을 앞세워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기성 정치인들에게 대한 실망과 혐오증이 고조됐을 때였다.
기존 정치권은 너무도 무능한 집단이며,나라의 장래보다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집단이라고 비난하는 페로의 혜성 같은 등장은 하루아침에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페로는 이후 자신을 중도주의자로 강조하면서 미국의 재건을 부르짖었다. 낙태 자유,총기규제를 지지하는 전통적인 진보적 이념과 환경보호청(EPA)을 없애자는 보수적 이념도 함께 내세웠다. 그의 지지율은 한때 39%를 넘었다. 당시 부시는 31%,클린턴은 25%였다.
하지만 기업에서 성공한 최고 경영자들의 공통점인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 페로의 성격이 문제였다. 결국 그의 인기는 25%로 떨어졌다. 페로의 진짜 몰락은 첫 번째 대통령 후보 토론 때였다. 페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터라 시청률은 매우 높았다. 이 토론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반대하는 페로의 논리는 궁색했다. 그 당시 57%의 미국 여론이 NAFTA를 지지했다. 결국 경험 많은 부시와 그동안 정치판에서 세련된 클린턴 앞에서 너무도 초라한 모습을 보여 그의 인기는 한방에 39%에서 7.9%로 하락했다. 페로를 성공한 기업가로 볼 때와 미국 최고지도자인 대통령 후보로 봤을 때와는 너무도 차이가 컸던 것이다. 결국 1992년 대통령의 꿈은 18.9% 득표로 좌절됐다. 1912년 이후 최초로 나온 제3당 후보는 이렇게 사라졌다. 페로는 1995년에 개혁당 후보로 대통령에 다시 출마했지만 후보 간 토론조차 끼지 못한 채 낙마했다.
정치 싸움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참신한 인물을 갈망하지만 막상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안 교수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궁금하다. 정치에 경험이 전혀 없이,정치판에서 검증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에 출마하는 건 위험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리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김창준 전 미국 연방하원의원 / 한국경제신문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