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鐘)은 도시 디자인의 축소판입니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고유한 상징물이나 도시만의 특징을 종에 새겨 넣거든요. "

이일규 한국디자인경영협회 이사장(60)은 종 수집광이다. 나라 안팎의 출장 · 여행에서 모은 소장품이 1000여점에 이른다. 분당 서현동 그의 집은 그야말로 종 박물관이다. 충북 진천에서 제작된 작은 범종을 비롯해 새(우루과이) 랍스터(미국 메인주) 모양 등이 새겨진 각양각색의 종들이 곳곳에 진열돼 있다. 안방 입구엔 수탉을 형상화한 포르투갈 종이 달려 있다. 기적 정의 행운 등을 상징하는 '바르셀루스의 닭'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이사장이 종 수집에 빠져든 시기는 1990년대 초반이다. 미국 뉴욕주재 상공부(현 지식경제부) 상무관으로 근무할 당시다. 짬을 내 미국 주요 도시를 찾을 때마다 그 지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나 도시의 문양을 담은 종에 매료됐다.

그가 디자인 분야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이 무렵이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파슨스디자인대의 찰스 올튼 학장과 교분을 쌓으면서 산업 측면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 이사장은 "한국에 디자인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며 "디자인이 상품이나 공간의 가치를 높여 기업이나 도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닫고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예정된 운명이었을까. 뉴욕 근무 4년을 마치고 귀국한 그에게 통상산업부(현 지식경제부) 초대 디자인정책과장 직이 맡겨졌다. 그는 3년 남짓한 기간 중 분당의 코리아디자인센터 설립을 기획하고 1997년 국내 최초로 각국의 디자인 정책 등을 비교 분석한 '디자인편람'을 편찬하는 등 디자인 정책 정립에 힘을 쏟았다. 이후 경기지방중소기업청장을 거쳐 한국디자인진흥원장,세계디자인경영연구원 이사장을 거치며 국내 디자인경영 분야를 개척해 왔다.

세계 디자인시장을 둘러볼 기회가 잦아지면서 종 수집에도 탄력이 붙었다. 미국 출장길에는 한 가정집의 '개러지 세일(garage sale · 차고 중고물품 판매)'에 들러 30여년간 손때 묻은 낡은 종을 구해왔을 정도다. 한국디자인진흥원장으로 있던 2006년 정부 예산을 따내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의 도시디자인(공공디자인) 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한 배경도 따지고 보면 종 수집과 무관치 않다. 그는 "선진 도시를 찾을 때마다 공간의 가치를 높여 수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원동력이 되는 도시 디자인의 위력을 절감했다"고 설명했다.

종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삶의 좌표로 활용하는 것도 수집벽이 가져다준 혜택 중 하나다. "어느 나라건 종은 '복음(福音)을 주는 상서로운 물건이고,사람이나 사물을 모이게 함으로써 긍정적인 행복의 기운을 생산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 이사장은 설파했다. 자신의 취미와 특기를 '사람 돕는 일'과 '사람 엮어주기'라고 항상 소개하는 배경이다.

그가 주도해 지난해 선보인 한국디자인경영협회에도 '종 철학'이 담겨 있다.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기업(수요자)을 찾아 디자인 경영을 접목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디자이너(공급자) 위주로 운영되는 기존 디자인 관련 조직과 차이가 있다. 디자인 경영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기업인들이 회원이다.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윤재봉 삼일회계법인 대표,이해선 CJ오쇼핑 대표,이현봉 넥센타이어 대표,최창환 장수돌침대 회장 등 벌써 1100여명이 가입했다.

이 이사장은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에 도움을 줌으로써 경쟁력을 키우고,100만여명의 디자이너와 일감을 창출하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