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땅속에 파묻혔던 폼페이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748년 스페인 군사 엔지니어인 록크 호아킨 데 알쿠비에레의 발굴 작업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토목공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 존재가 확인된 상태였다. 1599년 폼페이를 흐르던 사르누스강의 흐름을 바꾸기 위한 굴착공사의 책임을 맡고 있던 도메니코 폰타나가 공사 도중 갖가지 그림으로 뒤덮인 고대 건축물의 벽체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건물을 더 이상 발굴하지 않은 채 그냥 덮어버리고 말았다.

발굴을 계속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발견한 벽화에는 온통 남녀의 노골적 성애를 묘사한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16세기 말의 이탈리아는 개신교의 등장으로 잔뜩 신경이 예민해진 가톨릭 교단이 전통적인 윤리를 강조하는 등 보수화 움직임이 극에 달했는데 그런 분위기 속에 이런 그림의 존재를 보고했다가는 어떤 골칫거리가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폰타나는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폼페이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150여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764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에 나선 고고학자들은 도시 곳곳에서 발견된 에로틱 이미지와 매춘 문구들을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도시 규모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술집과 매음굴까지 확인됐다.

그것은 18세기의 윤리적 잣대로 봤을 때 부도덕의 극치였다. 폼페이의 성적 방종은 도시 공회당 벽에 쓰인 "이 도시에서 감미로운 사랑을 나누려는 자는 이곳의 여자들이 언제나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낙서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이런 퇴폐적인 분위기의 폼페이를 두고 한 방문객은 시내 중심가에'소돔과 고모라'라는 의미 있는 낙서를 남겼다.

유물을 보고 놀란 것은 발굴 관계자들만이 아니었다. 1819년 부인과 딸을 대동하고 나폴리 국립 박물관을 방문한 프란체스코 1세(1825년 시칠리아 왕 등극)는 그곳에 진열된 에로틱 이미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즉각 유물의 철거를 명하고 밀실에 보관하도록 했다. 이후 밀실의 에로틱 이미지는 100년 넘게 제한 공개와 비공개를 거듭하다가 1960년대 여성해방운동과 함께 최종적으로 일반 공개가 결정됐다.

폼페이는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도시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이 지독한 향락주의자들이었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혹시 동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우려는 폼페이에서 오래 전부터 현실이 됐다. 관광객을 유치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는 폼페이 당국과 향락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이 도시의 추잡한 유물들을 파괴해야 한다는 기독교 신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해왔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폼페이의 비극을 신의 심판으로 단언했다. 폼페이는 과연 저주받은 도시였을까.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