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 다니는 김모씨(45 · 서울)는 '디지털 노마드'다. 업무량이 많고 복잡하다보니 무선 인터넷이 되는 3G 휴대폰에 아이패드,첨단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PDA(개인 휴대 단말기)도 2대나 갖고 있다. 김씨는 새로운 디지털기기 제품이 나올 때마다 주변 지인들보다 빨리 구입해 서둘러 작동법을 익히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김씨는 최근 들어 기억력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고민이다. 과거 다이어리나 수첩 · 메모장을 이용했을 때보다 기억력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씨는 "옛날엔 안 그랬는데,요즘 들어 자주 집사람 전화번호나 숫자,사람 이름 등을 까먹는 경우가 잦아졌다"며 "몇 번이나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비밀번호 · ID를 잊어버리고,가끔은 방금 전에 책상 위에 놔두었던 보고서를 어디에 뒀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늘 단축키를 사용하다보니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 집 전화번호도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번호목록을 찾아야 기억해낼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건망증이 심해지자 대형병원 정신과를 찾았다. 병원에선 "뇌 질환 같은 질병이 아니어서 특별한 치료법은 없다"면서도 "'디지털 치매' 초기 증상으로 기억력 향상을 위한 생활습관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멀티미디어 시대,머리에 담아야 할 정보량이 폭증한 데다 각종 디지털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이처럼 두뇌의 기억능력이 나빠져 뭔가를 자주 잊어버리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이들 중 증세가 심해져 병원을 찾는 사람이 늘자 의학계에선 몇 년 전부터 '디지털 치매'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21일은 세계 보건기구(WHO)가 정한 '치매극복의 날'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65세 이상 치매환자는 46만9000여명으로 10명 중 1명꼴인 것으로 집계됐다.

최신형 디지털기기를 많이 활용하는 도시 샐러리맨이나 전문직 종사자들이 생활 속 건망증에 시달리는 추세가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매가 불면증 · 두통처럼 현대인에게 흔한 증상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디지털 치매에 걸리는 직장인들

전문의들은 "아직 치매와 디지털 치매를 정확히 구분하는 통계는 없지만 최근 들어 치매 상담을 받는 환자 3명 중 1명은 디지털 치매 증상을 보일 정도로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퍼져 있는 증상"이라고 말했다. 병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디지털 치매 환자의 60~70% 정도는 20~40대의 젊은 층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경규 이대목동병원 신경과 교수는 "온갖 정보를 대신 기억해주는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매일 사용하는 전화번호나 비밀번호 같은 것들을 종종 떠올리지 못하는 디지털 치매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단축키나 버튼 하나로 기억력과 사고능력을 대신해주는 디지털 장비들이 '기억하려는 노력과 습관'을 불필요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뇌의 '해마'라는 부위에서 주로 담당하는데,기억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마의 위축을 가져오고 기억 용량이 줄어든다. 여기에 과도한 음주와 스트레스,담배 등이 겹칠 경우 디지털 치매 증세는 더욱 심각해진다.

전문가들은 △가사 없이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별로 없다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는 집과 가족뿐이다 △암산한 것을 계산기로 꼭 확인해야 한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것보다 내비게이션을 더 신뢰한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키보드 입력이 더 편하다 등을 경험했다면 '디지털 치매'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치매 완화하려면

디지털 치매에서 벗어나려면 적절한 휴식과 기억을 키우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한다. 우리 뇌속에 '정신적 여백'을 가질 자투리 공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창수 고려대 안산병원 정신과 교수는 "디지털 치매는 뇌 질환이 아니라,정보 과다로 인해 뇌가 주변 정보를 자꾸 밀어내는 현상"이라며 "마음을 편하게 먹고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디지털 치매 환자들이 중증으로 발전하면 신경쇠약에 평소 생활이 예민해지고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결국에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치매 해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가급적 디지털기기 사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직접 머리를 굴려 잠자는 두뇌를 일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의학계에선 디지털기기를 많이 사용할수록 검색의 편리성은 커지지만 기억의 중요성은 낮아진다고 판단,체력 단련을 위해 에어로빅을 하듯 두뇌를 훈련하는 '뉴로빅스'(Neurobics)를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이를 위해선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나 좋아하는 노래 몇 곡 정도는 외우는 게 좋다. 또 신문이나 잡지를 매일 한두 시간 꼼꼼히 읽는 것도 유익하다. 생각하면서 읽는 기사는 기억력과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항상 필기구를 들고 다니며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울러 일기 쓰기도 권장된다.

박두병 중앙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자투리 시간에 시집 등 가벼운 독서를 생활화하고 그날 일을 컴퓨터가 아닌 일기장에 기록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은 디지털 치매 예방은 물론 정신건강 상으로도 아주 좋은 습관"이라고 충고했다.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