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복제한 음반…'원본' 뛰어넘을 날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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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 스토리 - 2030 기자의 아날로그 이야기
글렌 굴드 "레코딩은 音 이어붙인 조각의 집합"
건반 터치·음량 분석하면 자동연주 가능…미래엔 연주하지 않았던 곡 만들어 낼 수도
글렌 굴드 "레코딩은 音 이어붙인 조각의 집합"
건반 터치·음량 분석하면 자동연주 가능…미래엔 연주하지 않았던 곡 만들어 낼 수도
1955년 6월 어느 날,음반 회사인 CBS가 운영하는 미국 뉴욕의 한 방송 스튜디오에 젊은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성하(盛夏)를 코앞에 둔 시점이었지만 이 청년은 두꺼운 코트를 입고 머플러와 장갑,베레모로 온 몸을 무장하고 있었다. 두 개의 물병과 각각 다른 색으로 구분되는 5개의 약병,그리고 수건 한무더기를 가져온 그는 더운 물에 20분간 손을 담근 뒤 유독 낮은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기이한 자세로 연주를 시작했다. 연주 내내 몸을 앞으로 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의미 불명의 허밍을 쉴새없이 했던 이 청년의 이름은 글렌 굴드였다.
◆청중을 피한 피아니스트
이날 굴드가 녹음한 곡은 '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변주곡은 하나의 주제 선율을 여러 가지 형식으로 바꿔가며 연주하는 형태의 곡으로 바흐가 남긴 변주곡은 이것이 유일하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주제 선율을 제시하는 G장조의 아리아에서 시작해 총 30번의 변주를 거쳐 다시 처음의 아리아로 돌아오는 구조를 가졌다.
22세였던 굴드의 첫 음반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발매 즉시 음악계에 충격을 불러왔다. 기존 연주보다 더 느리고 서정적인 아리아를 선보인 굴드는 첫 번째 변주곡부터 깜짝 놀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30번의 폭풍 같은 변주가 지나간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느릿한 아리아로 끝을 맺는 이 음반에 사람들은 열광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비난을 가했다.
굴드는 파격적인 연주만큼이나 기행으로 유명했다. 대인기피증과 결벽증이 심했고 수많은 종류의 약을 복용했다.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굴드는 1964년 6월을 마지막으로 두 번 다시 무대에 나서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레코딩 작업을 통한 음반 제작이었다.
1982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굴드가 마지막으로 녹음한 음반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평생 동안 80장이 넘는 음반을 발매했지만 똑같은 곡을 녹음한 것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유일했다. 1981년 그는 26년 전 처음으로 음반을 레코딩했던 CBS 스튜디오에서 이 곡을 다시 연주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아리아를 시작으로 수많은 변주를 거쳐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굴드의 삶 역시 동일한 시작과 끝을 보여준 셈이다.
◆복제가 원본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굴드는 어떤 면에서 '음반'의 특성을 가장 먼저 이해한 음악가였다. 굴드 이전의 대다수 클래식 연주자들은 음반을 녹음할 때도 공연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연주했다. 반면 굴드는 마디 단위로 반복해 연주하고 마음에 드는 연주를 이어붙여 하나의 곡을 만들어냈다. 일부 비평가들이 이를 비난하자 굴드는 "대부분의 레코딩은 20분의 1초까지 다양한 음의 길이를 가진 테이프 조각의 집합"이라고 응수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음반 제작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오토튠 기술이 도입되면서 가수가 음정을 맞추려 노력할 필요 없이 소리 높낮이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굳이 무언가를 녹음할 필요도 없어졌다. 과거의 음반은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연주를 녹음해 만든 '복제'였지만 지금의 음반은 그 자체가 '원본'이다.
2006년 미국의 젠프 스튜디오는 굴드의 1955년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리-퍼포먼스(re-performance)' 작업을 통해 새롭게 내놨다. 이 회사는 굴드의 1955년 음반에 담겨 있던 건반 터치와 페달링,음량 등을 소프트웨어로 분석해 자동 연주가 가능하도록 만든 그랜드 피아노로 곡을 연주해 이를 녹음했다.
기술이 더 발달한다면 과거 음반을 단순히 '재현'해내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가령 굴드가 냈던 모든 음반을 분석한다면 굴드가 연주하지 않았던 곡도 그의 스타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원본의 복제가 다시 원본을 뛰어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굴드와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가 21세기 곡을 협연한 음반이 나온다면 이것은 원본일까 복제일까.
이승우 IT모바일부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