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 달러 환율이 거침없이 오르고 있다. 최근 9일 만에 102원(9.5%) 뛰어 22일 1180원 선을 위협했다. 시장에선 "2008년 금융위기를 보는 것 같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 당시에도 환율은 하루 20~30원가량씩 뛰었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여건)만 놓고 보면 환율이 가파르게 오를 이유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2008년 9월 2397억달러에 불과하던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3212억달러로 늘었고 전체 외채 중 1년 미만 단기 외채 비중도 79.1%에서 49.2%로 떨어졌다.

◆대외 불안+외국인 '달러 사자'

외국인, 하루 20억~30억弗씩 '사자' 주문…기업은 달러 매도 늦춰
문제는 대외 불안이다. 유럽 재정위기가 그리스에 이어 이탈리아로 옮겨붙었다. 미국도 국가 신용등급에 이어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씨티그룹 웰스파고 등 '빅3' 은행의 신용등급이 강등됐다.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인 미국과 유럽 경기는 단기간 내 회복되기 어렵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도 피해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이 공격적으로 달러를 사들이고 있다. 한 외환딜러는 "최근 싱가포르 홍콩 등 외국계 은행의 해외 은행 현지법인에서 5억달러 안팎의 역외 달러 매수 주문이 한꺼번에 쏟아질 때가 많다"며 "하루 100억달러 안팎인 서울 외환시장 거래량 중 많을 때는 그 비중이 20~30%에 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달러 매수 자금은 핫머니(국제 금융시장의 투기성 자금)와 실수요 성격이 섞여 있다. 1100원대에 달러를 매수한 외국인은 주로 실수요로 꼽히는 외국계 펀드로 알려졌다. 이들은 그동안 환율 하락 쪽에 무게중심을 뒀지만 유럽 위기가 확산되면서 환율 급등 쪽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전해졌다.

◆불안심리 자극하는 루머

환율 급등을 부채질하는 루머도 퍼지고 있다. 지난 21일 채권시장에서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핌코가 원화 채권을 매도하면서 10조원 안팎의 달러를 사들일 것이란 소문이 퍼졌다. 금융당국은 "확인 결과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또 미국계 펀드가 5억달러 정도를 장중에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는 루머도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계 자금의 이탈 가능성이 루머를 증폭시키고 있다. 외국인은 올 들어 주식시장에서 6조원 이상을 순매도한 데 이어 최근에는 채권시장에서도 유럽계 자금을 중심으로 이탈 조짐이 감지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외국인은 채권시장에서 9월에 1648억원을 순투자했다. 하지만 유럽계 자금만 놓고 보면 8883억원이 빠져나갔다.

◆'달러 팔자'가 없다

환율이 한쪽 방향으로 쏠리면서 국내에서도 달러 추격 매수에 나서고 있다. 제조업체 중 '달러 박스'로 불리는 조선업체도 가급적 선물환 매도를 늦추는 분위기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선박 수주대금이 들어오면 환헤지를 위해 대부분 기계적으로 선물환 매도에 나서지만 요즘처럼 환율이 오를 땐 일정 부분 매도 시점을 늦추기도 한다"고 말했다. 조선업체가 선물환을 매도하면 선물환을 매입한 은행이 환헤지(환위험 회피)를 위해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팔게 돼 환율 하락 압력이 커진다. 하지만 선물환 매도를 늦추면 환율 하락 압력이 줄어든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선박 수주대금의 70%,삼성중공업은 100%에 대해 환헤지를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외환시장의 흐름을 돌릴 수 있는 곳은 외환당국뿐이다. 하지만 달러를 내다 팔기가 쉽지는 않다. 대외 불안으로 외화 유동성 관리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부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 달러를 팔았다가 '달러 부족'으로 낭패를 봤다.

주용석/장창민/김일규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