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감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면 안되는데…." 연신 기침을 하면서 그는 말했다. 지난 추석 연휴에 4박5일간 에티오피아에 다녀오며 강행군한 게 화근이었다. 지난 6월 말 열흘 동안 현지를 방문한 이후 두 번째였다. 비행 시간만 12시간. 두바이에서 갈아타는 시간까지 합하면 16시간이다. 그는 고속도로가 뚫리지 않아 공항에 내려서도 편도 1차선의 좁은 길을 두 시간 이상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총리에서부터 교수 학생들까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굉장히 강했어요. 10년 뒤면 참 많이 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과거 미국 등 선진국의 도움을 받았듯이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나눠 줘야 하겠다는 생각에 결심을 했죠."

한국인으로는 처음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아다마국립대 총장(임기 5년)으로 부임하게 된 이장규 전 서울대 교수(65)의 '인생 2막' 각오는 명확했다. 그가 총장직을 제안받은 시기는 지난 6월 초. 에티오피아 정부의 정책자문을 맡고 있던 최영락 고려대 정보경영공학부 전문교수가 아다마국립대 이사장인 주네이디 도시부(civil service) 장관에게 그를 추천했다.

지난 8월 말 퇴임을 앞두고 있던 이 전 교수는 보람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달 1일 출국하는 그는 "한국의 인재 개발과 교육 모델,서울대의 성장 과정 및 경험을 전파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아다마시는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동남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제2의 도시다. 아다마국립대는 7개 단과대와 38개 학과로 이뤄져 있다. 학생 수는 2만여명,교수는 1000여명에 달한다. 정부로부터 과학기술중심대학으로 선정돼 집중 지원을 받고 있다.

▼총장으로 추대된 이유가 뭐라고 봅니까.

"평소 개발도상국 지원에 관심이 많았어요. 국내 학술대회에서 만난 파키스탄 사람의 초청으로 현지를 몇 번 방문했는데 공과대학을 세워달라고 하더군요. 현지 대통령이 바뀌면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계획은 무산됐어요. "

▼에티오피아에 가보니 어떤 인상이었나요.

"우리는 검은 대륙,암흑의 땅,덥고 물이 없는 나라,사람 살기 힘든 곳으로만 알고 있죠. 하지만 아디스아바바는 해발 2400m,아다마시는 해발 1800m에 있어 우리나라 봄가을처럼 쾌적한 날씨였어요. 농업과 축산업도 발달했죠. 아프리카에서는 선구적 국가입니다. 유럽연합(EU) 형태의 정치 · 경제연합체 창설을 목표로 한 아프리카연합(AU)의 본부가 아디스아바바에 있습니다. "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반응은 어떻습니까.

"에티오피아는 한국을 모델로 삼고 싶어합니다.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50여년 만에 밑바닥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간 나라는 한국밖에 없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경험과 한국식 개발 · 교육 모델을 배우려는 욕구가 무척 강합니다. 6 · 25 전쟁 참전국이어서 한국을 좋아합니다. 당시 일반병이 아니라 전투력이 뛰어난 황제 근위병을 파병했죠. 주네이디 장관도 한국 방송을 보려고 주말에는 집 밖에 안 나간다고 하더군요. 아프리카는 한국에 관심이 많고,우리나라도 자원 개발 등을 위해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고 있는 만큼 제가 총장을 맡게 된 타이밍이 좋다고 봅니다. "

▼아프리카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진출했는데.

"중국이 10년 넘게 자원개발에 공을 들였죠. 하지만 최근 중국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해요. 저가 입찰로 각종 공사를 싹쓸이하는 데다 노동자는 물론 심지어 밥하는 사람까지 중국에서 데려온다고 합니다. 기자재도 전부 중국에서 가장 싼 것을 들여오고,남는 물량을 시장에 내놔 에티오피아 업체들이 힘들어한다고 하고요. 단물만 빨아먹는 것 같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에는 좋은 기회일 수 있죠."

▼에티오피아 정부의 요구사항은 없었나요.

"조건을 전혀 내걸지 않았어요. 대학을 제대로 키워달라고 했죠. 주네이디 장관이 한국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공장을 세워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

▼총장으로서 대학 경영 구상은.

"학과장과 연구소장 등은 해봤는데 대학 전체를 책임지는 자리는 경험하지 못했죠. 능숙하게 경영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럴 때 이렇게 하라고 방향은 제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교수와 학생이 역량을 발휘하도록 해주는 것이 총장의 임무죠."

▼교수들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데.

"교수 1000여명 중 박사 학위 소지자는 50명가량에 불과합니다. 교수들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죠."

▼서울대와의 교류 계획은 있습니까.

"(웃으며) 비빌 언덕은 서울대뿐 아닙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할 것입니다. 서울대 외에 국내 다른 대학과의 인적 네트워크도 최대한 활용할 생각입니다. "

▼'이공계 엑소더스'가 심각합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로 일어선 데는 엔지니어의 공헌이 컸어요. 그런데 지금 세계 어느 나라도 공대를 이렇게 홀대하는 곳은 없습니다. 국가 지도자들을 봐도 이공계 출신이 너무 없어요. 이공계 가면 부속품 노릇이나 한다는 인식을 없애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 경영을 잘한 것입니다. 공과대부터 육성시켰잖아요. "

▼이공계 기피의 부작용도 적지 않을 텐데요.

"심각한 인재 유출이 문제죠. 우수 인력들은 밖으로 나가고,국내에서는 사람이 모자라 동남아 등 해외 인력으로 채워야 하죠. 지방대에는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 결국 국가와 산업도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

▼기업들은 인재를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미국의 연구소와 기업에서 일하면서 놀란 게 있어요. 직원들에게 공부와 운동할 기회를 충분히 준다는 것이죠. 연수를 간다고 하면 돈을 대줍니다. 운동시설도 잘 만들어 주죠. 퀄컴은 오후 5시만 되면 강제로 직원들을 내쫓는다고 해요. 부려먹고 단맛 빠지면 버리는 식이면 인재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레디-메이드(ready-made)된 친구들만 뽑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사내 인재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죠. 회사에서 바보 취급하면 바보가 되고, 잘한다고 하면 잘하게 됩니다. "

▼'스트롱 코리아(Strong Korea)'를 이루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정신적으로 강한 나라가 돼야 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산업과 경제 등 물질적인 분야에 집중하다 보니 정신적인 발전이 너무 안됐어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탓이죠. 한 단계 더 올라가려면 폭넓게 보는 교육을 시키고,서로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스트롱 코리아'가 되려면 옆 나라와 옆 대륙으로 눈을 돌려야 해요. "

◆ 이장규 총장은…항법유도 제어 분야 선구자

국내 항법유도제어 장치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다.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를 추적 · 제어하는 분야로 미사일 비행기 잠수함 등 무기뿐 아니라 자동차 휴대폰에까지 폭넓게 쓰이는 기술이다. 서울대에서 전기공학으로 학사학위를,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전기공학으로 석 ·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세계적인 항법유도 제어 연구소인 미국의 TASC와 CSDL에서 일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이로스코프(항법유도장치 센서)를 개발했다. 1991년 10월부터 1993년 6월까지 KBS TV의 '과학2001 프로그램'진행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주요 약력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용산고 · 서울대 전기공학과 △미국 피츠버그대 전기공학 석 · 박사 △미국 메릴랜드주 에브레디 컴퍼니 근무△TASC · CSDL 연구원 △서울대 제어계측공학 · 전기컴퓨터공학부 교수 △대통령 자문기획위원회 위원 △미국 버지니아공대 객원교수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