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PC 제조업체인 휴렛팩커드(HP) 이사회는 지난 22일 레오 아포테커 최고경영자(CEO)를 경질하고 멕 휘트먼 이사(55)를 신임 CEO로 선임했다. 휘트먼 CEO는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이베이 CEO를 지내며 회사를 세계 최대 인터넷 상거래업체로 키운 인물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는 휘트먼 CEO에 대해 "유연한 사고와 민주적 리더십이 돋보이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군림하지 않는 경영'으로 매출 90배 성장

휘트먼 CEO는 전 HP CEO인 칼리 피오리나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CEO로 꼽힌다. 휘트먼이 이베이 CEO로 취임했을 당시 회사 직원 수는 30여명이었고,매출 규모는 8600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10년 뒤 CEO에서 물러날 때는 직원 수가 1만여명으로 불어났고 매출도 90배 가까운 77억달러로 증가했다.

이베이 창업자인 피에르 오미디아르는 CEO 면접에서 휘트먼을 고른 이유로 "강한 결단력을 갖고 있지만 남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경영자였기 때문"이라고 밝혔었다.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는 휘트먼 CEO를 '경영하지 않는 경영자' '군림하지 않는 CEO'라고 표현했다. 고객 및 직원과의 소통을 가장 큰 미덕으로 생각하고,내부 반대가 심한 계획은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직원들의 요구 사항을 어떻게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휘트먼의 소통 능력과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는 사례가 페이팔 인수다. 2002년 이베이는 전자결제업체인 페이팔을 15억달러에 인수했다. 당초 휘트먼 CEO는 페이팔 인수에 회의적이었다. 회사 규모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인수 · 합병(M&A)에 큰 돈을 쏟아부었다가 잘못되면 회사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휘트먼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직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직원들은 이미 이베이 고객의 상당수가 페이팔을 통해 결제를 한다고 답했다. 페이팔을 인수하면 인터넷 상거래를 하는 데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휘트먼은 생각을 바꾸고 직원들의 요구대로 주요 주주들을 찾아다니며 페이팔 인수를 위한 설득 작업을 벌였다. 페이팔 인수는 이베이가 업계 1위가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시장을 거스르지 않는다"

패션 아이템과 함께 현재 이베이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물품 중 하나가 중고 자동차다. 이베이에서는 중고차 및 부품은 물론이고 보트까지 살 수 있다. 중고차를 인터넷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많았을 때 이를 도입한 것도 휘트먼이다.

이베이는 1999년 일부 회원들이 이베이 카테고리 메뉴에 없는 중고차를 사고 파는 것을 발견했다. 곧 대책 회의가 열렸다. 직원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절반은 자동차가 상대적으로 값이 비싸고 사기 피해 우려 등이 크다는 점을 들어 매매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거래하고 있는 상황에서 막는 것보다는 아예 중고차 메뉴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휘트먼은 잠시 침묵했다. 생각에 잠겼던 그가 내놓은 답은 "시장을 거스르면 안된다"였다. 이미 거래하는 고객들이 있기 때문에 회사는 사기 거래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결정은 이베이가 사업 초기 많은 회원들을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경제 전문 사이트인 마켓워치는 2003년 휘트먼을 '올해의 CEO'로 선정했다. 유연한 사고,고객에 대한 남다른 배려,시장 전망을 읽는 혜안 등을 갖췄다는 게 이유였다.

휘트먼은 이베이를 경영할 때 매달 고객 20명씩을 본사에 초대,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가 고객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가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고객을 만들고 직원들을 이끈 데 비해,휘트먼은 고객 및 직원과 함께 생각하고 호흡하는 것을 경영의 무기로 삼았다.

◆컨설턴트에서 장난감 회사 CEO까지

휘트먼은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다양한 분야에서 일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히는 '유연한 사고'는 여러 분야를 경험한 덕분이라는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뉴욕 태생인 휘트먼은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P&G와 베인앤드컴퍼니를 거쳐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월트디즈니사의 소비자 상품부서에서 마케팅 담당 부사장을 지냈다. 당시 휘트먼은 과학잡지인 디스커버를 인수하고 회사의 인쇄사업 부서를 통합하며 CEO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이후 최초의 민간 화초 재배 회사인 FTD,장난감 제조사인 하스브로 등의 CEO를 지냈다. 브랜드 매니저에서 시작해 경영 컨설턴트,여러 업종의 CEO까지 거친 그는 회사를 옮길 때마다 기존 직원들과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습관이 됐다. 생소한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그만의 생존 방식이었던 셈이다.

◆정치 외도,그리고 HP CEO로

기업 경영자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던 휘트먼 CEO는 정치에도 눈을 돌렸다. 지난해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 휘트먼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쌓은 경험을 활용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14억달러가 넘는 개인 재산 중 10분의 1인 1억4300만달러를 선거 비용으로 썼다. 그러나 민주당 텃밭에서 제리 브라운 현 주지사에게 패배했다.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은 HP였다. HP는 올해 1월 그를 이사회 멤버로 선임했다. PC 제조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탈바꿈하려던 HP로서는 휘트먼 CEO가 이베이에서 보여준 능력이 회사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가 새 CEO에 올랐지만 아직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휘트먼이 CEO가 된 뒤 이틀간 주가는 8% 이상 빠졌다. HP가 기업 간 거래(B2B)를 주로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소비자와 거래(B2C)하는 기업에서 경력의 대부분을 보낸 휘트먼이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분야의 회사를 성공으로 이끈 휘트먼 CEO는 자신만만하다. 그는 "큰 회사를 경영해 본 경험이 있고,B2B 업종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지만 실리콘밸리의 '큰 손'으로서의 감각은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