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세제 재정 건강 등 주요 분야의 정책이 잇달아 폐기되거나 표류하고 있다. 그것도 야당이 아닌 여당의 벽에 막혀서다. 내달 재 · 보선과 내년 총선 표를 의식한 여당의 포퓰리즘 행보에 정부 정책이 설자리를 잃는 형국이다.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감기약의 슈퍼 판매 허용을 담은 약사법 개정안은 여당이 반기를 들면서 국회 처리가 어려워졌다.

이에 앞서 이명박 대통령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던 감세 정책도 여당의 반대로 폐기됐다. 뿐만 아니다. 복지 예산을 둘러싼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한나라당은 정부 예산안에 당의 요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보육 · 보훈 · 노인 예산 증액을 추진하기로 했다.

임기 말로 접어들면서 대통령의 '영(令)'이 서지 않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주재한 2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감기약 슈퍼 판매 법안이 폐기 위기에 처한 게 단적인 예다.

청와대는 불만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정치권이 선거를 앞두고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있다"며 "국민 편익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 대통령이 법안 처리에 강한 의지를 밝혔지만,야당은 물론 여당 대표까지 한목소리로 반대하는 상황인 만큼 국회 통과는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관측이 많다.

감세 정책의 전철을 밟는 모습이다. 정부와 여당은 2008년 말 '과표 2억원 초과 구간'에 대한 법인세 세율을 22%에서 20%로,'과표 8800만원 초과 구간'에 대한 소득세 세율을 35%에서 33%로 각각 깎아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담긴 이 법안은 3년 만에 여당에 의해 폐기됐다. 지난 4월 재 · 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한 뒤 황우여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 지도부와 소장파들이 강공 드라이브를 걸면서 청와대와 정부는 결국 이달 초 백기를 들었다.

사상 최대 규모 복지 예산(95조원)을 담은 내년도 예산안의 운명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주영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은 28일 "양육수당 및 보육료 지원 확대와 남성 배우자 육아휴가제 등 보육 예산이 당이 요청했던 것보다 미흡하다"며 "국회 심의 과정에서 반영하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밀어붙이면 정부는 손을 쓸 방법이 없다. 표에 눈먼 정치권에 재정 건전성은 남의 일이다. 정부 관계자는 "균형 재정 달성에 비상등이 켜졌다"고 우려했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