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애초에 변별(辨別)이 없기도 하고 애초에 변별이 있기도 하니,변별이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천하가 통틀어 한 물건이고,변별이 있다는 측면으로 말하면 나의 몸조차 한 물건이 아니다. 천하가 통틀어 한 물건이고 보면 장주(莊周)와 나비,나비와 장주에 어찌 변별이 있으리오.나의 몸조차 한 물건이 아니고 보면 나비와 나비,장주와 장주에 어찌 변별이 없으리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시인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 1478~1534)의 《용재집(容齋集)》에 실린 '장주호접변(莊周胡蝶辨)'의 일부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고 보면 나비가 애초에 나비가 아니었고,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고 보면 장주가 애초에 장주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한 꿈 속에 너울너울 날아다니던 나비가 장주가 아니었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으며,꿈에서 깬 장주가 나비가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장주는 그대로 장주라 하고 나비는 그대로 나비라 하느니만 못할 것이니,이를 '인시(因是 · 옳음은 옳음대로 두고 그름은 그름대로 두는 것)'라 하며 이를 '불변지변(不辨之辨 · 분변하지 않는 분변)'이라 한다. 불변지변은 오직 성인이라야 알 수 있다. '

이 글은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호접몽(蝴蝶夢)의 이치를 설파하고 있다. 장자(莊子)의 이름이 주(周)다. 장주(莊周)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 자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꿈속에서 장주는 유유자적하여 자기가 장주인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꿈을 깨자 장주로 돌아왔다. 장주는 자기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자기가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장주와 나비,나비와 장주가 또렷이 변별되면서 또한 변별할 수 없으니 지극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치는 변별을 양식으로 삼는 지식 너머에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큰 성인이라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호접몽 외에도 장자는 '제물론'에서 '큰 깸이 있은 뒤에야 현실이 꿈이었음을 안다(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고 했다. 꿈이라 인식되는 현실뿐만 아니라 꿈인 줄 아는 자신조차도 꿈 속의 사람이므로 주관과 객관이 모두 큰 꿈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고승 서산(西山) 휴정(休靜)이 읊은 '삼몽사(三夢詞)'라는 시가 이 이치를 묘파한다. '주인은 꿈 속에서 손님에게 얘기하고(主人夢說客)/손님도 꿈 속에서 주인에게 얘기하네(客夢說主人)/지금 두 꿈을 얘기하는 이 사람도(今說二夢客)/역시 꿈 속의 사람인 것을(亦是夢中人).'

주인과 손님이 각각 자기 꿈 속에서 상대방을 마주하고 얘기하는데 두 사람이 꿈 속에서 얘기한다고 말하는 자신도 꿈 속의 사람이라니 참으로 큰 꿈이 아닐 수 없다.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이 시를 두고 "인세(人世)를 꿈으로 본 시가가 고래로 얼마나 많은지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지만 서산의 20자를 넘어설 작품은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도 객체인 현실도 몽땅 한바탕 큰 꿈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좋다 싫다,옳다 그르다가 모두 꿈 속의 허망한 일이라면 눈앞에 엄연히 전개돼 시시각각 접하는 사물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자는 "장주는 그대로 장주라 하고 나비는 그대로 나비라 하느니만 못할 것이니,이를 '인시(因是)'라 하며 이를 '불변지변(不辨之辨)'이라 한다"고 말한다.

사물을 인식할 때 사물과 인식 주체인 자기 사이에 '나'란 관념,또는 이러저러한 상념들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무너지고 허망한 꿈도 사라진다. 이것이 변별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불변지변으로 큰 꿈을 깨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접하면서 무엇이건 자기 생각을 가지고 변별하는 습성이 있다.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놓고 나와 남,나와 사물을 변별하여 인식하는 과정이 바로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느끼는 삶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진정한 삶은 큰 꿈인 인식의 변별 너머에 있다. 진달래는 자신이 붉다고 한 적이 없고 개나리는 자신이 노랗다고 한 적이 없다. 진달래는 분별함이 없이 붉은 빛을 나타내고 개나리는 분별함이 없이 노란 빛을 나타내고 있으니,내가 붉은 진달래를 보고 붉다 하고 노란 개나리를 보고 노랗다 해도 그것은 분별함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불변지변이 아니겠는가.

작자는 불변지변의 이치는 오직 성인만이 안다고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공사판의 땀에 젖은 사내나 시장판의 목이 쉰 아주머니에게 이 이치를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