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의회연맹(IPU) 집행위원인 필자는 올해 가을 총회를 마지막으로 임기를 마친다. 지난 3년간 여러 회의에 참석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폭력이 난무하던 우리 국회의 모습을 떠올리면 한없이 부끄러웠지만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감사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 의원들에게 '한국의 발전'을 자랑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발전한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설명했다. 외국의 대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현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할 때는 과연 그런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선진국'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어느 면에서 우리가 더 잘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활달함은 물론이고,도시의 색깔도 우리가 더 밝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시대는 달라지고 있다. 서구 문명은 이제 긴 그림자만 드리운다. 문명 서진론도 문명 동진론으로 교체되고 있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문명 서진론'에 따르면 에게 해(海)와 지중해의 그리스-로마 문명이 스페인으로 넘어간 것은 16세기.이를 주도한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는 오직 국가발전을 위한 문서 검토에 진력했던 '서류 왕'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축했다. 그 뒤 문명은 다시 서진해서 영국으로 넘어갔는데,이는 영국 해군이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기 때문이다.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군림했던 스페인이나 영국의 시대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으며,20세기는 미국문명의 절정기였다. 그런데 이제 그 문명이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동아시아로 넘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문명 서진론'에 대한 반격도 만만치 않다. 인류 문명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되었으며,이것이 동진해서 인도에서 꽃을 피웠고 다시 동남아를 거쳐 중국에서 절정기를 맞이했다는 것이 '문명 동진론'이다.

오늘 한반도는 문명 동진론과 문명 서진론의 교차지가 되었다. 두 개의 문명에 의해 새 문명을 열어야 하는 전초지가 된 셈이다. 문명의 교차지라면 새로운 문명화의 생활양식부터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희망의 미래를 위한 약속일 수 있다. 에게 문명이 인간주의를,로마 문명이 포용의 다양성을,스페인이 극기와 모험을,영국이 규율과 명예의 '빅토리안 젠틀맨 십'을 이룩한 것도 새 문명의 코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문명의 새 코드는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K팝도 있고,삼성 갤럭시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인간다운 삶의 본질이 중요하다. 국민총생산(GNP)이나 국내총생산(GDP)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사람다움을 이룩하기 위한 경제적인 조건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성장만 따라가다가 잊혀져 버린 '행복지수(HPI)'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그 위에 인간다움의 가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문명의 교차지에 선 한국의 미래가 약속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