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장인의 혼, 종이보다 얇은 금꽃 피웠다
서울 돈암동에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한 소년이 있었다. 온종일 범상찮은 솜씨로 나무 조각상 등을 만들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소년이 초등학교 3학년 되던 해 이웃에 살던 귀금속 공예 장인을 만났다.

단박에 귀금속 공예의 매력에 빠진 소년은 장인의 제자로 들어갔다. 중 · 고교를 나온 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기술을 계속 배웠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환갑에 가까운 나이.이임춘 국제쥬얼리디자인 대표(58)는 그렇게 50년 동안 귀금속 공예 외길을 걸어왔다.

이 대표는 1998년 노동부(현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부터 금은세공 분야 명장 칭호를 받았다. 그는 1988년 서울지방기능경기대회 명장부 1등을 차지하며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2년에는 당시 세계 최고의 귀금속 디자인 공모전인 '홍콩주얼리디자인공모전' 전문가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한국인 최초 입상이었다. 그는 귀금속 세공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8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대표 작품의 묘미는 '두께'에 있다. 그는 금이나 은을 망치(쇠 나무 세라믹 소재)로 수만 번 두드려 종이보다 얇게 펴는 타출기법(打出技法)의 달인이다. 국보 87호로 지정된 신라시대 금관총 금관도 이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이 대표의 작품 중에서는 A4용지 두께(0.08㎜)의 4분의 1 수준(0.02㎜)으로 은을 편 것도 있다. 금으로 만든 카네이션 꽃잎은 0.05㎜ 정도로 얇다.

"다음달 20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장사동 센추럴관광호텔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명장 작품전시회에 제가 금 · 은으로 만든 카네이션과 장미꽃 작품 20여점을 전시합니다. 얇게 편 금 · 은으로 꽃잎을 만들면 바람이 불 때 하늘하늘 흔들리죠.국내외 공모전이나 전시회에 수없이 나가봤지만 금 · 은을 이 정도로 얇게 만드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

이 대표는 귀금속 공예계의 기술 수준을 크게 끌어올리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금은 공예업자들이 사용하는 '왁스기법'은 1997년 이 대표가 개발한 것이다. 왁스기법은 값싼 밀랍으로 공예품의 모양을 만들어 이것을 석고 속에 넣어 금형을 뜨는 방식이다. 끌이나 정 같은 공구로 직접 금 · 은을 깎을 때 생기는 손실 부분이 적고,빠른 시간 내에 부피감이나 입체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대표는 "기술 특허를 냈다면 돈을 많이 벌었을 테지만 내지 않았다"며 "내가 너무 어렵게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남들은 더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게 나의 바람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한 지 50년이 되니까 이제 배울만한 건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반세기 가까이 한 분야에 종사하면 이런 '득도'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일까. 이 대표는 "그 동안 기술을 익히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에만 관심을 가져왔다"며 "이제는 배운 것을 이용해 자체 브랜드 출시 등 적극적으로 상품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리 상품화를 하더라도 이 대표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기본 원칙이 있다. 반세기의 행로는 그에게 철학을 심었다. "핸드메이드 작품만 만들겁니다. 기계로 찍어내는 방식으로는 세밀한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어요. 유명 귀금속 브랜드들이 그런 영혼 없는 차가운 금속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죠.저는 금속에 혼을 불어넣는다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