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응고제를 투여했다가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에 집단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에게 약품을 공급한 제약사가 손해배상을 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대법원 3부(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29일 혈우병 치료제를 투여한 뒤 에이즈에 걸렸다며 혈우병 환자 이모(22)씨 등 16명과 가족 53명이 제약사 녹십자홀딩스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혈액제공자 중 한 명이라도 감염된 경우 그 혈액을 원료로 사용한 풀에서 만들어진 모든 혈액제제가 오염될 가능성이 높다"며 "에이즈바이러스(HIV)에 감염된 혈액도 항체 미형성기에는 음성반응이 나오게 되는 점에 비춰볼 때 원고들이 혈액제제 투여 후 바이러스 감염이 확인됐다면 혈액제제의 결함 또는 피고의 과실과 감염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어 "에이즈에 감염된 일부 원고들이 외국산 혈액제제나 수혈을 받았다고 해도 이런 추정이 번복된다고 할 수 없다"며 "그럼에도 혈액제제와 감염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본 원심 판결에는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약물 투여 후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면 제약사의 과실과 감염 사이의 인과관계를 자연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증명하지 않아도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증명책임을 완화해야 한다는 취지다. 때문에 약물로 인한 의료사고 분쟁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또 손해배상 시효에 대해서는 "시효 계산의 기준이 되는 `불법행위를 한 날'이란 가해행위가 있었던 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손해가 발생한 날'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이어 "잠복기가 길거나 발병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을 감염일로 보게 되면 피해자가 실제로 손해를 본 시점에 시효 때문에 청구하지 못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판시했다. 에이즈는 잠복기가 10년으로 길어 HIV 감염과 구별되는 에이즈 발병 때 현실적으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봐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혈우병을 앓아오던 이씨 등은 녹십자홀딩스가 설립한 한국혈우재단에 회원으로 등록한 뒤 재단을 통해 이 회사가 제조한 혈우병 치료제를 유·무상으로 공급받았다. 이후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되자 2003년 녹십자에 총 32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에서는 혈액제제 투여와 에이즈 감염 사이의 연관성을 최초로 인정해 이씨에게 3000만원을, 가족에게 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나머지 원고들은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안지 10년이 넘어 시효가 소멸했다며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2심은 "혈액제제 투여와 에이즈 감염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며 1심 판결을 뒤집어 이씨를 포함한 모든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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