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 지 1주일 만에 청국장…소통엔 폭탄주 최고"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한경과 맛있는 만남 - 이토키 기미히로 소니코리아 사장
8개국 경험 '글로벌 플레이어'지만 부임한 곳마다 철저히 현지화 전략
시장 변화따라 도수 낮춘 진로처럼 고객이 바뀌면 소니도 바뀌어야
8개국 경험 '글로벌 플레이어'지만 부임한 곳마다 철저히 현지화 전략
시장 변화따라 도수 낮춘 진로처럼 고객이 바뀌면 소니도 바뀌어야
하지만 한국은 소니의 라이벌인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버티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십년간 글로벌 TV시장을 석권했던 소니의 아성을 무너뜨린 두 기업들에 대한 부담이 없을 수가 없다.
그가 소니코리아 대표로 부임한 때는 지난해 7월.한국 근무를 통보받았을 때부터 고민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삼성과 LG의 나라'에서 어떻게 소니를 이끌지가 걱정이었다. 그는 소니코리아의 첫번째 일본인 사장이다. '일본 회사니까 결국 일본인이 사장으로 오는구나'라고 생각할 직원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도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1993년 이후 세계 8개국을 돌며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있었다. 한국 근무에 임하는 첫 각오는 '철저한 현지화'였다.
지난 27일 저녁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 맞은편에 있는 '진주청국장'에서 이토키 사장을 만났다. 한 달에 두세 번씩 들른다는 단골집이다. 국산 콩을 사용해 고소하고 짜지 않은 청국장을 만들기로 유명한 곳이다. 청국장이 나오자 첫숟갈을 뜨더니 "아주 좋아요"를 연발했다.
"한국에 온 지 1주일 만에 청국장을 처음 먹어보고 독특한 맛에 반했습니다. '냄새가 심하지 않냐'고들 하는데 저에게 청국장 냄새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입니다. 어디선가 청국장 냄새가 나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납니다. 아내도 저처럼 맵고 향이 강한 음식을 좋아해서 같이 자주 먹으러 다닙니다. "
이토키 사장은 "청국장에는 막걸리가 잘 어울린다"며 막걸리를 시켰다. 외국인치고는 말투와 행동이 생경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스스럼이 없었다. "첫잔은 한 번에 다 마셔야 한다"면서 잔을 비운 뒤 한국 막걸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동안 선배 기자들에게 술자리깨나 불려 다녔지만 처음 듣는 얘기였다. "막걸리는 만든 지 나흘 정도 지났을 때가 가장 맛있습니다. 지금 이 막걸리는 어제 만든 것이니 가장 맛있을 때는 아니네요. 사흘쯤 지나서 마신다면 더 맛있을 겁니다. "
한국 술에 대한 전문지식(?)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한국술 중에는 소주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왜냐.술자리가 회사경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소주를 '기적의 물'이라고도 했다.
"사원,대리,과장급 직원 대여섯명과 저녁을 함께 먹는 'CEO 디너'라는 행사를 정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5번 정도 했는데 어제 저녁도 삼겹살에 폭탄주를 먹었죠.직원들은 사장과 마주앉으면 처음엔 입을 다물고 있지만 폭탄주가 몇 순배 돌고 나면 그때부터 얘기를 합니다. 소주 같은 술은 저에게 직원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기적의 물'입니다. "
이토키 사장은 경영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도 한국 소주의 변천사를 사례로 든다. 직원들에게 소주 역사를 설명하면서 소니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는 것.주류회사 직원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얘기들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진로가 처음 소주를 내놓았을 때가 1957년이었죠.그때 알코올 도수가 30도였습니다. 노란색 라벨이 붙어 있었고요. 시간이 흐르면서 도수가 점점 낮아져 지금은 19.5도입니다. 진로 공장에 가서 도수를 낮춘 이유를 마케팅 담당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시장이 독하지 않은 소주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젊은 여성과 같은 새로운 고객층을 끌어들이려면 변화가 필요했다고도 해요. 저는 바로 그것이 소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죠.시장이 변하고 고객이 변한다면 소니도 당연히 변해야 합니다. "
실제 이토키 사장은 소니코리아에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 그렇다고 나이 많은 사람들의 역할을 줄이겠다는 것은 아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주고 좀 더 원활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이것이 소니 고유의 기업문화인데 한국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상명하복식 업무가 아니라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고 상사에게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것이 소니의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이토키 사장은 입사 4년째가 되던 1993년,소니 인도에서의 근무 경험을 소개했다. TV 판촉을 위해 비디오 CD용 타이틀을 만들어 판매하려고 했지만 콘텐츠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본사에 인도영화로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보고한 뒤 뭄바이에 가서 저작권자와 협상했다. 인도문화에 가까이 가기 위해 50편 이상의 인도영화를 봤다는 이토키 사장의 얘기에 감동한 저작권자는 현지 명작 50선을 공짜로 제공해줬다. 하지만 정작 영화 50편의 CD 제작에 들어가려고 하니 예상 외로 많은 비용이 들었다. 본사에 비용 50% 지원을 요청하자 '직접 와서 일을 도우면 반값에 해주겠다'는 답변이 왔다. 이토키 사장은 보름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인코딩을 하고,포토샵으로 재킷도 손수 만들었다.
"나중에 그 CD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어요. 다른 회사들도 제가 만든 포맷을 따라 인도 영화 콘텐츠 제작에 나섰지요. 지금도 스스로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소니의 문화입니다. "
그러면서 한국 직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 저것 시키지 않고 방향만 알려주면 알아서 척척 해낸다는 것.그것도 아주 스피드가 빠르다고 했다. 그래서 최근 내린 결정이 전체 직원의 5% 이상을 일본 본사나 싱가포르 지역본부 등으로 보내기로 한 것."한국의 우수한 인재들를 해외로 내보내면 소니 본사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폭넓은 해외경험을 쌓는다는 점에서도 당사자들에게 이로울 겁니다. "
이토키 사장은 한국에서도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1주일에 4번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음식을 먹고 영화와 공연을 즐기는 것도 그런 믿음에서다. 얼마 전 한국어 능력 시험 3급을 봤지만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도 계속 도전하겠다고 한다. "시험장에 중국,러시아 등에서 온 젊은이들도 많았어요. 둘러보니 저만 '아저씨'더라고요. "
주말에 한국어 수업이 끝나면 부인과 함께 뒷골목과 시장을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그곳에서 한국의 실물경제를 떠받치는 '아줌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한국 경제는 삼성과 LG 같은 대기업들이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상은 매일 시장에 나와 억척같이 일하는 상인들이 경제의 더 중요한 혈맥이라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아줌마'대신 '이모'라고 부르면 가격을 조금 더 깎을 수 있다는 노하우도 들려줬다.
◆ "삼성 · LG 직원들 충성심 대단…존경스러워요"
"지난 설날 노량진시장에 갔는데 추운 날씨에도 작은 난로 하나를 놓고 열심히 일하는 아줌마들이 많더군요. 자식을 가르쳐야 하는데,남편 경제력은 부족하고,그래서 자기가 가족을 책임진다고 합니다. 골목길은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습니다. "
이토키 사장이 도전하는 것은 또 있다. 바로 전라도 토속음식인 삼합이다. 한국에서 순대국 보신탕같은 음식도 몇번씩 먹어보고 가족들도 마찬가진데,유독 삼합만은 친숙하게 다가서지 못하겠다는 것.그래서 괜찮은 삼합식당이 있으면 추천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좋아하는 한국노래는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와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이란다. 아이돌 가수중에는 아이유도 좋아한단다. 그러더니 지갑을 꺼내 꼬깃꼬깃 정해놓은 '광화문 연가' 가사 메모를 꺼내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한국 노래 정말 좋아요. 일본 노래보다 훨씬 리듬감과 정감이 있어요. "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토키 사장은 할아버지,할머니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아한다. 그들에게서 한국의 과거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으면서 한국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회사 부하 직원의 아버지와는 아직도 연락하고 가끔 밥도 같이 먹는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전통에 무관심한 것 같다고 했다. "설날에 한국 전통문화를 느끼고 싶어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한옥마을에서 널뛰기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또 설날 복조리를 다는게 전통이라고 해서 복조리를 사려고 했는데 인사동이나 시장 어디서도 찾기 어려웠어요. 한국의 '빨리빨리'문화는 분명 큰 장점이지만 때로는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사흘 전 남대문시장에서 복조리를 사서 사장실 문에 걸어놨다고 덧붙였다.
이토키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의 앞에 놓인 청국장 그릇이 맨 먼저 말끔히 비워졌다. 오후 5시에 시작한 저녁대화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 사이에 막걸리를 계속 주문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셨다. 그는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입에 넣으면서 "생선(젓갈) 들어간 김치도 잘 먹고 다른 김치도 잘 먹는다"고 했다. 손님들이 몰려들어 주위가 어수선해지는 것 같아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소니 본사는 한국 시장을 어떻게 봅니까. "이어지는 이토키 사장의 대답은 이랬다. "한국은 작지만 매우 중요한 시장입니다. 또 한국기업들로부터 배워야할 것도 많습니다. 삼성과 LG를 단순히 경쟁자만으로 보지도 않아요. 그들은 소니 부품을 사 주는 중요한 고객들이기도 합니다. 삼성과 LG 사람들의 추진력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보면서 놀랄 때가 많았어요. 한마디로 존경스럽습니다. "
한국 고객들도 높이 평가했다. "예전에 소니는 '일본 고객이 만족하면 세계가 만족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한국 고객이 만족하면 세계가 만족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 신제품을 일본보다 한국에서 먼저 출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은 IT(정보기술)가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한국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시장으로 본사에서도 주시하고 있습니다. "
▼1957년 일본 도쿄 출생 ▼홋카이도대 원자력공학과 ▼도시바 원자력 본부 엔지니어 ▼소니 인도,터키,루마니아 주재원 ▼소니 유럽 영업마케팅 부사장 ▼소니 베트남 사장 ▼소니코리아 대표이사 사장
◆ 이토키 사장의 단골집 진주청국장
덜 짜고 고소한 맛 '일품'…선찬 메뉴는 '한 상 가득'
1986년 진주에 처음 문을 열어 서울 여의도를 거쳐 현재 서초동에 위치하고 있는 25년 전통의 청국장 전문점이다. 양재역 1번 출구에서 멀지 않으며 외교안보연구원 맞은편 원효빌딩 지하 1층에 자리하고 있다. 메뉴로는 청국장 단품(7000원)을 비롯해 한정식 메뉴인 정찬(1만3000원),선찬(1만9000원),삼합정식(2만2000원) 등이 있다. 선찬 메뉴를 주문하면 간장게장,노랑호박전,보쌈,야채쌈,오색나물,모둠전,가오리찜,청포묵 등 한상 가득 잘 차려진 찬들과 청국장,된장 중에 하나를 선택해 식사할 수 있다. 찬은 메뉴와 당일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진주청국장의 청국장은 국산콩을 사용하며 일반 청국장과 서리태콩 청국장 중 선택할 수도 있다. 다른 곳에 비해 덜 짜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심혈관계 질환에 좋을 뿐 아니라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유명한 청국장에 염도까지 낮춰 더욱 인기다. 일반 청국장집들과 달리 깔끔하게 차려져 보다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02)525-6919
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