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철은 이미 지났고 단풍철은 아직 시작되기 전이니 이 시절에 팔자 좋게 여행 다닐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길은 한산하고 호젓하다. 나는 강원도로 향한다.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방향 감각이라곤 없어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녀석은 언제나 가장 짧은 길,지름길을 일러준다. 허나,나는 출장 가듯 바쁘게 길을 나선 게 아니니 유유자적,일부러라도 돌아가며 아름다운 길을 고른다. 곧장 가면 세 시간이면 닿을 거리를 산도 보고 바다도 보고,돌고 돌아 해거름에야 숙소에 닿는다.

다음날 아침,강원도의 산들 위로 해가 솟아오른다. 여름내 내리던 비가 그친 후엔 서울도 햇빛 좋은 날들의 연속이어서 초가을의 청명한 하늘을 행복하게 올려다 보곤 했다. 하지만 강원도의 햇빛은 질적으로 다르다. 빽빽이 솟은 빌딩들의 눈치 볼 것 없이 거침 없이 쏟아져 내리는 햇빛답게 본질적이고 또 투명하다. 널리 퍼지는 햇살과 함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먼 데 산들을 창가에 서서 오래 바라본다.

이젠 본격적으로 강원도 땅을 밟을 차례다. 차를 몰고 강원도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보이는 데는 온통 산 산 산,나무 나무 나무."와,산들 좀 봐""어머,저 나무들!" 나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린다. 하긴 여행자는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예전에 체코 프라하에 갔을 때 그걸 느꼈다.

프라하 옛 시청사엔 천문 시계탑이 있다. 매시 정각이 되면 시계 위쪽 창이 열리면서 예수와 열두 제자 모습을 한 인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동화 같은 장면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광객이 한참 전부터 광장에 모여 '공연'을 기다린다. 그리곤 인형들이 나타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결국 관광이든,여행이든,길 떠난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상과 다른 것을 보고,느끼고 싶어 떠나는 것이니 대상이 특별하지 않더라도 크게 웃고 기뻐한다. 이번 휴가에 나는 첩첩이 쌓인 산과 능선과 나무와 바람에 감탄한다.

다시 서울이다. 비와 안개를 뚫고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나오니 다시 일상이고 아파트 숲이다. 머리 속은 다시 빠른 속도로 분주해지고 해야 할 일들의 목록도 길게 이어진다. 하지만 느낌이 좀 다르다. 3박4일 내내 여러 시간을 운전했음에도 그다지 피로하지가 않다. '강원도의 힘'인 걸까.

몇 년 전,대상포진을 치료해 주던 의사의 얘기가 생각난다. 재발이 잦다는 말에 근본 치료는 안 되는 거냐고 물었다. 의사는 이렇게 답했다. 근본 치료는 하나님만 하는 거다,인간은 그저 감기처럼 관리하며 살아가는 거다….

휴가 며칠 다녀온다고 근본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몸에,마음에 다시 에너지가 차오르고 생기가 돈다는 거다. 그래서 휴가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달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