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국내 기업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미국 기업들이 값싸게 매물로 나왔지만 인수 · 합병(M&A)을 시도하려는 기업은 적었다. 동원산업이 북미 참치캔 시장 1위 업체인 스타키스트를 인수한 것이 고작이었다.

유럽발 위기가 발생한 지금은 달라졌다. 기업들은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을 가동하면서도 유럽 기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를 포함한 유명 유럽 기업들이 국내 기업의 '쇼핑 리스트'에 올라 있다. 일부에서는 유럽 기업 사냥에 나서 '역(逆)마르코폴로 효과'란 신조어를 낳은 중국 기업에 뒤질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유럽의 역사'를 사기 위한 국내 기업의 행보는 이제 시작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유럽의 역사를 산다

'유럽 쇼핑'에 가장 공격적인 곳은 패션 · 뷰티 기업들이다. 이랜드는 작년 이탈리아 '라리오1898'과 '벨페'를,올해 '만다리나 덕'을 잇따라 인수했다. LG패션의 이탈리아 명품브랜드인 A사 인수작업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LG패션은 별도의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 A사를 인수한 뒤 이 회사로부터 라이선스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국내외 사업을 전개할 것으로 전해졌다.

다른 패션 · 유통업체들도 유럽 명품 브랜드 '사냥'에 뛰어들었다. 롯데백화점은 최근 과장급이던 밀라노법인장의 직급을 부장으로 격상시킨 뒤 M&A 기업 탐색 임무를 추가로 맡겼다.

김해성 신세계인터내셔날 사장은 "임기 내에 유럽 브랜드 하나쯤은 꼭 사겠다"고 말할 정도다. 백덕현 코오롱인더스트리FnC 부문 사장 역시 "이런 기회가 어디 있겠느냐"며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매물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의 행보도 주목받고 있다. 기존 사업만 착실히 키워 온 대표적인 자생형 성장(organic growth) 기업이 지난 7월 '아닉 구탈'을 인수하며 M&A 시장에 발을 들여놨기 때문이다.

최준철 VIP투자자문 대표는 "패션 · 화장품업체들이 유럽 브랜드를 인수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중국 시장"이라며 "유럽의 역사와 스토리를 사서 이를 중국에 선보이겠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제조업체도 M&A 저울질

제조업체들의 유럽 M&A도 본격화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삼성을 비롯한 IT기업들은 '특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럽 IT기업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다. 동원산업도 유럽 참치캔 업체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원산업은 2008년 미국 스타키스트를 인수하며 태국의 타이 유니언과 함께 글로벌 양대 참치캔 업체로 부상했다. 지난해 진행됐던 HJ하인즈의 유럽 참치캔 브랜드(MW) 매각 입찰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원산업의 금융 관련사인 한국투자증권의 고위 임원이 이번주 유럽 출장을 떠나는 것도 이와 관련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사모펀드들의 발길도 분주하다. 우리투자증권은 지난 7월부터 사내에 관련 태스크포스(TF)를 설치했다. 최근 사모투자펀드(PEF) 담당 임원이 그리스 현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최근 PEF를 통해 타이틀리스트를 만드는 아큐시네트를 인수한 미래에셋도 유럽 명품업체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
기업 "위기는 기회"…유럽 명품브랜드 '쇼핑'
◆M&A 위한 '실탄'도 충분

국내 기업들이 유럽 기업 사냥에 나서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 때의 학습효과 영향이 크다. 유명 업체를 값싸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자금사정도 괜찮다. 삼성전자만 해도 2008년 말 6조6485억원이었던 현금성 자산이 올 6월 말 9조7743억원으로 늘어났다.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상위 10개사(금융권 제외)의 현금성 자산도 23.7% 증가했다. 지난달 말 170개를 넘어선 국내 PEF도 충분한 실탄을 바탕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종건 KOTRA 밀라노센터장은 "중국은 이미 유럽의 명품 브랜드를 싹쓸이하고 있고,최근엔 태양광,풍력 전문 기업에까지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며 "우리 기업들도 늦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KOTRA는 이와 관련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 역(逆)마르코폴로 효과

중국이 인수 · 합병(M&A)을 통해 해외 우량기업을 쓸어담는 현상을 뜻한다. 700여년 전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기술을 세계에 알린 것과 반대로 중국이 해외에서 직접 선진 기술과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만들어낸 용어다.

박동휘/오상헌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