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쓰면 오랑캐"…최만리는 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인문학 산책 - 한국고전번역원과 떠나는 지식여행
중국과 글, 법도 같이해왔는데 한글 창제라니…놀랍고 부끄럽다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세종대왕, 조목조목 반박
중국과 글, 법도 같이해왔는데 한글 창제라니…놀랍고 부끄럽다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세종대왕, 조목조목 반박
1443년(세종 25년) 세종은 새로 우리글 28자를 창제했다. 그해 12월30일 실록은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초성 · 중성 ·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은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훈민정음은 창제 동기가 밝혀져 있는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으뜸 가는 문자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은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용되지 않으므로,어리석은 백성들이 말을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한 자가 많다. 내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써서 날로 사용함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고 한글 창제 동기를 밝혔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만리였다. 1444년 2월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최만리가 꼽은 첫 번째 한글창제 반대 이유는 문자를 만드는 것이 중국을 사대(事大)하는 데 잘못이라는 점이었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
최만리는 이어 "예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오직 몽골 · 서하 · 여진 · 일본과 서번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라며 중국 글자가 아닌 고유 문자가 있는 나라는 모두 오랑캐 민족임을 강조했다.
또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려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서리나 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안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기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아무리 되풀이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라고 했다. 이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최만리는 세종이 "형살(刑殺)이나 옥사에 임하여 한글을 쓰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에 반박해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세종은 최만리의 상소문을 보고,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겠느냐.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세종은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고 했다.
세종은 무엇보다 한글이 백성들에게 편리한 글임을 강조하면서 최만리의 비판 상소를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백성을 최우선으로 한 세종의 정신은 한글 창제와 더불어 나타난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의 간행이나 측우기,자격루와 같은 과학 기구의 발명에서 그 꽃을 피웠다.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