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원칙이 있었다. '털 한 가닥,머리카락 한 오라기일지언정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다른 사람이 되니,결코 바꾸지 말아야 한다'(승정원 일기)는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 임금의 초상)엔 오른쪽 눈썹 위에 육종이 있고,숙종 · 영조 때 문신 오명항의 초상화에선 간암 말기 증상인 흑달과 두창의 흔적이 보이는 이유다. 프랑스 화가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 실제 모습과는 달리 유럽을 평정한 영웅의 이미지로 미화된 것과 대비된다.
종이 뒷면에 색을 칠해 앞면에 색깔이 반투명 상태로 은은히 드러나게 하는 배채법(背彩法)을 쓴 것도 특징의 하나다. 현란한 색깔을 배제한 채 고도의 사실성과 자연미를 구현하려는 의도였다. 이렇게 그려진 초상화는 그림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인물의 현신(現身)으로 보고 제의적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초상화의 비밀'전(11월6일까지)은 조선시대 초상화 200여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다. 공재 자화상과 태조 어진은 물론 이순신 정몽주 황희 박문수 윤증 강세황 채제공 김정희 황현 등 역사 속 인물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논개 계월향 최연홍 등 충절을 상징하는 여인들의 초상화도 나와 있다.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송시열과 허목 등 시대의 맞수들이 나란히 걸려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예술적 가치도 가치지만 조선 500년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과장 없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눈 밝은 사람들은 그림 속 정신세계까지 읽어낸다. 목적을 위해 실상을 비틀고 왜곡하기 일쑤인 요즘 터럭 한 가닥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사실 존중 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