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면·창의성 발전動因 외면해
자유가치 폄훼…대중선동 우려
김정래 < 부산교대 교육학 교수 >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많은 이들에게 반향을 일으켰지만,그만큼 많은 식자들로부터 그 진정성에 의심과 우려를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각론에 관해서는 경제학을 전공한 논객들의 비판이 있으므로,경제 외적 논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자유시장의 존재 부정이다. 저자는 아예 책 서두에 '자유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유물론적 관점에서만 성립한다. 유력한 집안에서 성장한 장 교수에게 모성애를 보여 달라고 질문한다면,그가 뭐라고 답할지 매우 궁금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오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어(fact term)'와,그렇지 않은 '관념어(notion term)'가 있다. 문명세계의 중요한 언어들은 대부분 관념어로 이뤄져 있다. '사랑' '자유' '책임' '창조' '질서' 등은 모두 관념어이다. 물론 '남대문시장'처럼 구체적인 장소를 지칭하는 사실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시장'은 관념어이다. 시장을 규정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자생적 질서'도 관념어이다. 유물론의 눈에는 자생적 질서만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질서'가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물론의 시각에서 자신의 '더 나은 자본주의'를 '눈으로 보여줘야' 한다.
둘째 장 교수가 자신의 사고 이면에 깔고 있는 진보관이다. 판촉 차원에서 한 것으로 보이지만,내표지에 남긴 친필메모를 통해서 마치 독자들에게 '투쟁동력' 충전을 권장하는 듯 '진보'를 강조하고 있다. 200년 전의 노예해방,100년 전의 여성참정권,50년 전의 독립운동이 당시에는 황당하고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지금 보면 모두 진보의 산물인 것이기 때문에 '진보'에 매진하자는 메시지인 듯하다. 인류 문명이 진보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특히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은 '진보'가 이뤄낸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오늘날 우리들이 향유하는 진보는 엄연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이뤄낸 산물이다.
셋째 책 곳곳에 계획경제를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주도의 전체주의 기획이 우려된다. 과도한 민주화 욕구를 앞세워 로버트 노직이 경계한 '억측의 역사(conjectural history)'를 그린 청사진을 통해 자유의 가치를 폄훼하고 '거대사회공학'을 기획해 큰 정부로 가는 것이 능사인 것처럼 주장한다. 인류 역사에 다수 민중의 공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개인의 창의적 주도로 이뤄진 과학,예술 업적과 기업의 공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넷째 근면,창의,기업가 정신을 왜곡하는 사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 부자나라 사람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는 그의 주장은 원인혼란의 오류이다. 부자가 된 이면에는 근면과 남모를 창의정신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여유를 만끽하는 것은 게으르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쌓은 부를 향유하고 있다는 징표다.
진실처럼 보이지만 실제 진실이 아닌 경우를 '하프 트루스(half-truth)'라고 한다. 하프 트루스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진보'가 인류 사회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점은 대부분 장밋빛 청사진으로 거창하게 포장된 진보의 공약과 정책들이 정체가 불분명한 하프 트루스인 것은 그것이 곧잘 대중 선동논리로 동원되기 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