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옷이 접힌 주름 표현과 같은 섬세한 색채 묘사가 뛰어났다. 하지만 이 천재화가는 거짓말쟁이에 술고래이며 호색가에다 사기꾼으로 입방아에 오르기 일쑤였다. 50세에 성모상을 그리러 간 수녀원에서 성모 모델인 루크레치아를 유혹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이 정도의 '천덕꾸러기' 화가라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문예부흥을 일으킨 메디치가는 달랐다. 피렌체의 '국부'로 추앙받는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난봉꾼 수사인 필리포의 그림을 눈여겨본 뒤 사기꾼이라는 악명을 무시하고 메디치 궁에서 일할 것을 요청했다.
필리포는 메디치 궁의 화실에 들어와서도 호색성을 이기지 못하고 화실에서 뛰쳐나가 여자를 찾아 헤매곤 했다.
그림 작업에 차질을 빚자 코시모는 급기야 그를 화실에 가두고 약속한 그림을 끝낼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그는 가위로 침대보를 잘라 밧줄을 만들어 도망쳐버렸다. 코시모는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런데 필리포의 탈출 소동은 예술가 지원에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코시모는 이때부터 "예술가는 존중돼야 하며 예술가를 그저 장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원칙을 내렸던 것이다.
이 원칙은 메디치 가문이 문예부흥을 주도하는 새로운 율법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새로운 예술가 후원 시대가 열리고 르네상스가 본격화될 수 있었다.
메디치가는 필리포의 탈출 소동을 겪으면서 예술가에게 애정과 친절로 대하고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해주기로 태도를 바꾸었다.
즉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바로 난봉꾼 필리포의 기여(?) 덕분에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다. 필리포는 '성처녀의 대관식'을 비롯한 걸작을 만들어 메디치가에 화답했다.
코시모는 금융업을 통해 축적한 재산을 피렌체의 문화와 예술 진흥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조각가 도나텔로,기베르티,루카 델라 로비아,건축가 부르넬레스키,미켈로초,화가 안젤리코 수사 등이 그의 후원으로 이름과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손자인 로렌초에 이르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배출되면서 피렌체의 르네상스 문화는 최고조에 달했다.
메디치가는 은행업으로 재력을 축적한 중산층의 평민 가문 출신으로 피렌체의 통치자가 됐다. 그래서 귀족들의 견제를 받았고 암살 음모도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귀족들에 의해 추방되기도 했지만 다시 평민들의 지지를 얻어 복귀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를 연 코시모는 피렌체의 귀족들과 대립해 수년 동안 추방당한 후 민중의 지지와 상업 자본에 힘입어 정권을 장악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달리 말하자면 메디치가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평민들의 편에 서 예술가를 후원하며 민심과 예술을 얻을 수 있었고 35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효찬 < 연세대 연구원 · 자녀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