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로 날아가 회사의 시멘트공장 입지 타당성을 조사해 보고하라."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와 현대양행(현 두산중공업)에 입사한 청년 김종훈에게 이듬해인 1978년 6월 첫 해외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나이지리아는 한국과 외교관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우선 비자 받는 게 급선무였다. 고심 끝에 영국을 거쳐 입국하기로 했다. 런던에서 1주일을 머물면서 고생한 끝에 나이지리아에 들어간 그는 당시 일본항공(JAL)에서 발급받은 런던행 탑승권(보딩패스)을 소중히 가슴에 갈무리했다.

1996년 국내 최초의 건설사업관리(CM) 전문회사 한미글로벌(옛 한미파슨스)을 세운 김종훈 회장(62)이 아끼는 소장품 1호는 보딩패스다. 현대양행과 ㈜한양 등을 거치며 지금까지 50개국을 다니면서 모은 407장의 탑승권(국내 탑승권까지 합쳐 487장)이 두 권의 스크랩북에 빼곡히 꽂혀 있다. 그가 보딩패스를 모으는 까닭은 건설사업의 기획부터 설계 발주 시공 감리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관리 감독하는 CM에 눈을 뜨고 사업을 일군 자신의 인생궤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물아홉에 업무차 떠난 첫 여행이 지금 500회 가까이 이르고 있어요. 휴식을 취할 때 탑승권을 뒤적이다 보면 젊은 시절 추억도 생각나고,도전정신도 다지고,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릅니다. "

김 회장에게는 '타지 않은 탑승권'이 한 장 있다. 1995년 삼성물산 건설부문에 몸담고 있을 때다. 당시 삼성물산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98층짜리 쌍둥이 빌딩을 짓고 있었다. 뉴욕을 거쳐 말레이시아로 출장 갈 일이 생겼다.

"뉴욕 JFK공항에서 말레이시아행 비행기를 탔는데 예정보다 30분이 지나도 출발을 하지 않는 거예요. 한참 뒤에 '항공편이 취소됐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더군요. 이유가 황당했습니다. 조종사가 안 나왔다는 거예요. 쿠알라룸푸르행 다른 항공편을 잡으려다가 못 잡아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말레이시아로 들어갔습니다. "

이 사건은 그가 회사를 설립한 뒤 안전을 중시하는 경영방침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처음엔 어이가 없었어요. 다른 조종사를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했죠.곰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당시 항공사가 노스웨스트였는데,비행 취소에 따른 신뢰 상실과 엄청난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승객의 안전이 더 우선이라는 과감한 결정이었던 것이죠."

정반대의 상황도 겪었다. 지난해 미국의 종합엔지니어링사인 오택을 인수하기 위해 국내 항공편으로 로스앤젤레스로 출장 갈 때의 일이다. "이륙한 지 한 시간 만에 엔진에 문제가 생겨 회항해야 할 사태가 벌어졌는데 항공사 본사에선 조종사에게 '웬만하면 그냥 가라'는 지시를 내린 겁니다. 다행히 조종사의 판단으로 일본 간사이공항에 비상착륙해 큰 사고는 없었지요. "

김 회장은 업무차 비행기를 탈 때 주로 혼자 다닌다. 그에게 해외여행은 휴식이자 안목을 넓히는 기회이고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는 원천이다. 직원들에게도 여행을 자주 권한다. 2006년 복지 차원에서 두 달간 유급으로 안식휴가제를 도입한 것도 그 일환이다. 임직원들이 눈치를 볼까봐 김 회장이 제일 먼저 다녀왔다.

여행동호회인 '발칸클럽'을 조직해 지난해엔 체코와 오스트리아로 예술여행을 다녀왔다. 김종욱 전 우리투자증권 회장,원대연 한국패션협회장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 회장은 "보딩패스 1000개 확보가 목표"라며 "그때까지 뛰다 보면 회사를 세계 CM업계 10위권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며 밝게 웃었다.

홍성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