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렛팩커드(HP)가 멕 휘트먼 전(前) 이베이 최고경영자를 새 CEO로 선임했다. 지난해10월 임명했던 레오 아포테커를 1년도 안돼 바꾼 것. 이유는 실적부진. HP주가는 올 들어 반토막나다시피 했다. 조기해임의 대가는 막대하다. 퇴직금 720만달러와 양도조건부 주식 356만달러어치에 성과급 240만달러까지.

휘트먼의 영입조건도 만만치 않다. 연봉은 ‘1달러’지만 2012년 목표달성 보너스만 ‘240만달러’다. 엄청난 부담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CEO를 바꾼 건 그만큼 절박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레이 레인 HP회장은 “투자자들의 비판을 잠재우고 다양한 기회 속에서 이점을 취할 수 있는 새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시 여성을 최고경영자 자리에 앉힌 것이다. 컴퓨터 업계 최초의 여성 CEO였던 칼리 피오리나를 내보낸 지 6년만이다. HP는 스탠퍼드대 졸업생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1939년 창업한 실리콘 밸리 기업의 시조다. 첫제품 음향발진기를 내놓은 뒤 휴렛은 기술, 팩커드는 경영을 담당했다. HP는 50년 뒤 전자 측정, 컴퓨터와 주변기기,광학기기 분야를 아우르는 초우량 글로벌기업이 됐고, 1995년엔 포브스의 ‘올해의 기업’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창립자가 세상을 떠난 뒤 시대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면서 HP는 휘청거렸다. 1999년 CEO로 영입된 칼리 피오리나는 기존의 조직문화를 바꾸고 2002년 컴팩을 인수합병했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우려와 PC성장세 정체에 따른 주가하락으로 피오리나는 2005년 사퇴했다.

피오리나의 뒤를 이은 마크 허드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한 비용 절감으로 수익성을 개선시켰지만 연구·개발(R&D) 분야 투자를 줄이면서 창의성 퇴보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던 중 지난해 10월 성추문으로 퇴진했다. 후임인 아포테커는 HP를 소프트웨어업체로 변신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취임 이후 HP의 실적은 3분기 연속 하락했고 결국 1년도 안돼 교체됐다.

휘트먼이 위기의 HP를 구할 수 있을지는 알 길 없다. 하드웨어냐 소프트웨어냐 사이에서 회사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여론도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하버드대 MBA로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인터넷 경매사이트 이베이를 맡아 세계 1위의 전자상거래 기업으로 키웠지만 법인영업 부문에서 일한 경험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라이벌인 오라클이 HP 인수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문도 나돈다. 분명한 건 전세계 120여개국에 600개 이상 지사를 보유하고 2010년 기준 매출액만 353억4600만달러인 거대 기업이 자칫 벼랑끝으로 몰릴 상황에서 여성 CEO를 영입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거센 파도 속에서 방향을 잃은 HP가 여성 경영자에게 명운을 걸었다는 얘기다. 할 수 있는건 다해보겠다는 뜻일 게다.

쉽진 않을 게 틀림없다. 과거와 달라졌다고는 해도 여성 CEO를 향한 편견과 못마땅한 시선은 여전할 테고 시장 여건이 금세 호전될 리도 없는 까닭이다. 그렇더라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관행과 습성, 기존의 인간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남성이 분노하면 열정적, 여성이 분노하면 감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을 극복해야하는 만큼 시각은 다양하고, 소수에 대한 포용성도 지닌다. 모두가 지켜보는만큼 청렴해야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끊임없이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만큼 실력면에서도 뒤질 리 없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8월 여성도 사장이 돼봐야 하고 사장이 못 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것도 그같은 사실에 기초했을 것이다.

인사철을 앞두고 온갖 이유를 들어 막아보려는 이들이 적지 않을 지 모른다. ‘중요한 업무를 담당해보지 않았다, 대외 업무에 취약할 수 있다, 남성과 사고구조가 다르다.' 하지만 앞차를 앞지르자면 차로를 바꿔야만 한다. HP가 구원투수로 여성 CEO를 영입하는 마당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다.
올 연말 삼성 인사에서 여성 CEO 배출이 아쉬운 이유다. 삼성이 앞장서면 다른 기업은 자동적으로 따라올 게 틀림없다.

박성희 < 수석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