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서 How로…讀書법도 유행탔다
한국사는 세계사다. 평범한 생각이지만 쉽게 깨닫기 어렵다. 우리나라가 위대한 세계제국을 건설한 것도 아니고 찬란한 세계문명을 일으킨 일도 없는 것 같은데 한글이나 거북선 같은 것으로는 세계사를 말하기 빈약하지 않은가.

하지만 오해하지 마시라.세계사는 그런 뜻이 아니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독특한 생활 습관을 만들었다. 그것들은 모두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인간 삶의 문제로 조명될 가치가 있다. 세계사란 우리 스스로 지구인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할 세계 인류의 보편적인 삶의 역사인 것이다.

전통시대 한국사는 세계사적인 문제들을 적지 않게 담고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독서다. 조선시대는 후기로 갈수록 유교문화가 확산되면서 전 사회적인 차원에서 독서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넘쳐났다. 개화기 서양인이 감탄했듯이 곳곳에 책이 있었고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삶의 외양 때문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글 읽기에 관한 남다른 안목을 갖고 있었다. 조선 말기 선비 이상수(李象秀 · 1820~1882)가 쓴 《어당집》의 '글 읽기(讀書)'를 보자.

"글을 읽는 사람은 먼저 종지(宗旨)를 구하고 다음으로 결구(結構)를 찾아야 한다. 결구를 찾지 못하면 종지의 중요한 곳이 나오지 않는다. 포치(布置)의 차례,맥리(脈理)의 단락,지분(枝分)의 마디를 요연히 밝게 분석해야 마침내 전체를 관통하고 작자의 묘한 곳이 비로소 드러난다. "

이상수는 공연을 관람하는 난쟁이 비유를 끌어들이며 종이 위에 적힌 것만으로는 글을 잘 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반고,사마천,한유,구양수의 글은 아이들부터 노인까지 그것이 어째서 묘하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이미 한유,구양수,반고,사마천이 지은 것이라서 자연히 묘할 것이고 옛사람이 이미 모두 추앙하였고 온 세상이 모두 외워 익히니까 나도 그것이 묘하다고 한다. 이것은 난쟁이가 공연을 구경하는 것이다. 난쟁이가 공연을 구경하다 나중에 온 키 큰 사람이 앞을 가려 보지 못하는데,이윽고 관중들이 크게 웃으면 난쟁이도 웃는다. 너는 무엇을 보았길래 웃었냐고 물으면 키 큰 사람이 모두 웃으니 필시 웃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나도 웃었다고 대답한다. "

독서의 역사는 오래됐다. 그만큼 독서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글 읽는 습관도 한결같지 않았다. 한적본(漢籍本)을 읽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독서는 일반적으로 음독이었다. 반면 양장본을 읽는 근대계몽기 신사들의 독서는 묵독이었다.

'집중적인(intensive)'읽기에서 '포괄적인(extensive)'읽기로의 변화도 주목해야 한다. 자기 삶의 초월적인 변혁을 위해 책을 읽었던 사람들은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천 번 만 번 집중적으로 읽었다. 성인이 남긴 육경을 자연스럽게 마치 자기 삶에서 쏟아진 자기 말처럼 능숙히 읽을 수 있는 경지에 간다는 것,그 경건하고 치열한 과정에 취미로서의 독서는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책이 증가하고 지식이 확장되면서 사정은 바뀌었다. 성인의 글과 대면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왜 읽느냐는 물음 못지않게 어떻게 읽느냐는 물음이 중요해졌다. 자기 삶의 현존에 비추어 글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통찰하는 '깨달음의 읽기'보다는 책의 언어적 특성에 비추어 글의 구성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눈썰미의 읽기'가 중요해졌다. 포괄적인 읽기가 확산된 결과였다.

이상수는 포괄적인 읽기 시대에 접어들어 향촌 사회의 선비들을 위해 글 읽기 전략을 새롭게 마련했다. 그는 글이란 언어적 인공물이라는 가정을 취하고 있다. 먼저 글의 주제를 파악한 다음 글의 구성을 분석하라,그래야만 고전이 왜 훌륭한 글인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기초적인 현대 논술 강의를 방불케 한다. 먼저 언어를 탐구하라,동일한 한자어라도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이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다를 수 있음에 주의하라,최초의 한자어가 지역적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또 시대적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공간적 · 시간적 변화가 발생할 수 있음에 주목하라.이는 학술적인 역사언어학 강의 같다.

이상수가 살았던 시대는 서울을 중심으로 문학과 고증학이 풍미했다. 조선의 학계는 경향 간에 문학 대 도학,고증학 대 주자학의 구도로 갈리고 있었다. 경화학계에서 향촌사회로 이주해 온 이상수가 문학과 고증학에 입각한 방법론적인 글 읽기 전략을 마련했을 때 과연 향촌사회 선비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성인의 글을 분석적으로 읽기 전에는 성인이 추구한 진리를 확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성인의 글을 성인이 살았던 시대의 언어적 조건에서 역사적으로 독해해야만 비로소 성인과 자신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상수의 제안은 그런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방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노관범 < 가톨릭대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