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사건은 조사하기도 전에 진이 빠져요. 미군 관련 사건은 되도록 안 맡고 싶습니다. " 서울 도심의 한 주점에서 최근 미8군 소속 A이병과 한국인 B씨가 말다툼 끝에 주먹다짐을 벌였다. 술집 주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근처를 배회하던 A이병을 붙잡았다.

신원을 확인하고 미군에 인도했지만 A이병은 1주일이 다 되도록 경찰에 출석하지 않았다. "미군 측이 경미한 사건이라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덮으려는 분위기였어요. B씨는 '왜 미군은 조사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미군과는 협조가 안 되고….결국 (A이병이) 나오긴 했지만 중간에서 애 많이 먹었어요. "

13일 만난 서울 용산경찰서 K형사의 하소연이다. 주한미군이 집결하는 이태원동을 관할하는 용산경찰서는 외국인 범죄라면 이골이 났다. 최근 '이태원 살인사건' 유력 용의자가 미국에서 붙잡히면서 일반인의 관심도 부쩍 높아진 상태다. 용산경찰서에서 만난 형사들은 주한미군 범죄 수사에서 가장 큰 애로점으로 '신병 확보'를 꼽았다.

"신병 확보도 잘 안 되는데,툭하면 '경찰이 초동수사에 소극적'이란 얘기만 나와요. 검거하고 조사하고 검찰에 송치하기까지 자유롭게 이뤄지지 않는데 말이지요. 수사 여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합니다. " 같은 서 L형사의 설명이다.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규정이 미군에 유리한 게 사실이에요. 내국인은 체포해서 48시간 동안 구금하면서 조사하는데 미군은 그쪽에서 구금하니까요. " 2001년 개정된 현행 SOFA는 살인 · 강간 등 12개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현행범으로 체포된 미군 피의자만 한국 수사당국이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답답하기는 다른 경찰서 소속 형사들도 마찬가지다. "현행범으로 체포하지 않는 이상 인적사항이 특정됐다 하더라도 피의자가 경찰에 출석하는 데 1주일은 걸려요. " 고시텔에 침입해 10대 여학생을 성폭행한 미군 혐의자를 현재 수사 중인 마포경찰서 담당자의 얘기다. "일단 통역 때문에 미군 관계자들이 오는데 그러면 피의자가 위축되지 않아요. 만취해서 여기가 경찰서인지 어디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

강남경찰서 관내에서는 지난 10일 카지노 출입을 막았다는 이유로 난동을 부린 미군이 붙잡혔다. 용산에서도 '퍽치기'를 일삼던 주한미군 자녀들이 적발됐다. 데이비드 J 콘보이 미8군 부사령관이 12일 이례적으로 강남경찰서를 방문한 이유다. 콘보이 부사령관은 주한미군 범죄가 늘어나는 것과 관련, 유감을 표명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우리 정부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했다.

정부는 13일 관계부처 합동회의를 열고 주한미군 범죄의 기소 전 수사권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경찰 차원의 초동수사 권한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의견이 모이는 대로 내달 한미SOFA합동위원회에 개선 방안을 제시할 방침이다.

하헌형/김우섭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