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점령'엔 책임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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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시위로 경제회복 안돼…대안 없는 행동 포퓰리즘 전형
'반대 위한 반대' 사회 해악만
복거일 < 소설가 / 객원논설위원 >
'반대 위한 반대' 사회 해악만
복거일 < 소설가 / 객원논설위원 >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얻은 것은 물론 그들의 항의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방만하게 운영해서 파산으로 몰렸다가 미국 정부의 엄청난 지원으로 회생하자,두둑한 보너스부터 먼저 챙긴 미국 금융 기업들의 행태는 우리의 정의감을 너무 거스르는 탐욕이다.
문제는 금융가를 물리적으로 점령하는 것만으로는 사정이 나아질 수 없다는 점이다. 시위대가 금융 기업들을 소유하거나 경영할 길은 물론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부의 지원을 받은 금융 기업들의 종업원이나 주주들이 너무 많은 보수나 배당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 일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설령 그 일을 무리 없이 이루더라도 경제 상태가 나아지진 않는다.
애초에 금융 기업들의 높은 보수나 배당이 경제 위기의 근본적 요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과실(過失)도 비난을 받아야 하지만,그것도 이번 경제 위기의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 위기를 낳은 요인들은 여럿이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경제학자들도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일이나 책임을 배분하는 일에서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세계 경제가 빠르게 진화하면서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은 당연히 위험하고 우리는 아직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므로,경제 위기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터이다. 분명한 건 금융 기업들의 탐욕에 돌아갈 책임은 통념보다 훨씬 작다는 점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월가의 점령은 분노의 몸짓을 넘어서지 못한다. 거기에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경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지식도 힘도 없다. 그래서 그 운동은 새로운 무엇을 낳을 힘이 없다.
정복자는 정복한 땅을 약탈하거나 점령한다. 약탈이야 그냥 끝나지만,점령엔 정복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 활동이 지속되도록 할 책무가 따른다. 자신들이 그런 책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면,정복자들은 약탈해서 돌아가거나 세금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래의 통치자들을 그대로 앉힌다. 미국이 지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점령이 얼마나 힘든 책무를 포함하는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월가를 물리적으로 점령한 사람들은 점령에 따르는 책무를 수행할 힘이 없다.
게다가 부자들을 공격하는 일은 금융 기업들의 탐욕과 과실을 비난하는 일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현존하는 질서를 파괴하려는 충동으로 아주 해롭다. 가장 부유한 1%와 나머지 99%로 시민들을 자의적으로 나누고 전자 때문에 나머지가 가난하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찾는 재화를 공급해서 돈을 벌었다. 그 과정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경제가 성장하는 동력을 제공했으며 세금을 많이 냈다.
이처럼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점령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반응하는 민중주의(populism)의 전형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민중주의는 좋은 정책이나 기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월가를 점령한 사람들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물러날 것이다.
'여의도를 점령하라'는 구호엔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가 지닌 최소한의 자연스러움과 정당성도 없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사정이 크게 다르다. 우리 금융 기업들은 정부의 막대한 도움으로 파산을 면한 것도 아니고,임원들이 터무니없이 많은 보너스를 받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억지 흉내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그것은 사회에 적지 않은 해를 끼치고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