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트 회장 "기업하기 힘들어 공장 해외로 옮기겠다"
이탈리아 로마 테르미니역 인근 레푸블리카광장.15일(현지시간) 이곳엔 2차 세계대전 후 최대 인파가 모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이 집결했다. 피켓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20만명은 넘을 것이라는 게 현지 언론의 추산이다. 이날 집회는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반(反)월가 시위가 명분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었다. 군중이 수십만명이라는 규모면에서 다르고,은행에 돌이 날아들고 경찰차가 불타는 등 폭동 수준의 시위가 발생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왜 유독 이탈리아에서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한 것일까. "우리는 재정위기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날 구호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재정위기의 대가란 임금 삭감과 해고는 물론 연금 축소 등 복지의 후퇴를 의미한다. 시위대 중 한 명인 가에타노 페르리에리(54)는 "한 달에 최고 5000유로(796만원)로 묶인 연금 상한선을 풀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복지거품의 무서운 청구서

피아트 회장 "기업하기 힘들어 공장 해외로 옮기겠다"
이탈리아 국민을 거리로 내몬 것은 '포퓰리즘의 복지거품'이 범인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1994년 집권해 연금개혁을 추진하다 7개월 만에 물러났었다. 그러나 2001년 이전과 정반대의 정책을 들고 나왔다. 가난한 남부지역엔 복지 확대를,부자 동네인 북부엔 감세를 약속하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세금은 덜 걷고 복지를 늘릴 수 있도록 한 요술 방망이는 '빚'이었다.

지난해 말 현재 이탈리아의 부채 규모는 1조9000억유로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20%다. 그가 집권할 당시엔 103%에 불과했다. 반면 2001년부터 10년간 경제성장률은 평균 0.2%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평균 1.1%에 턱없이 모자랐다. 이탈리아 제1야당인 민주당의 프란체스코 보차 하원의원은 "현 정부는 복지 혜택을 확대하면서 인기 때문에 감세 정책도 함께 폈다"고 비판했다.

재정이 튼튼하지 못한 상태에서 높은 수준의 복지를 누리려니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나라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결국 지난달 긴축이란 카드를 꺼냈다. 공무원 숫자와 복지 혜택을 단계적으로 줄이기로 했다. 이날 로마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에서 시민들은 "정치인들은 도둑" 이라고 외치며 정부의 긴축 계획을 질타했다.

◆노정(勞政)유착으로 재정 파탄

포퓰리즘은 노조정책에도 투영됐다. 이탈리아 노동법은 신규 고용 및 해고를 어렵게 규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조와 정치권의 결탁은 기업의 부담 증가란 결과로 나타났다. 지나친 친노동자 정책으로 기업 경영환경이 악화되면서 이탈리아 최대 자동차 기업인 피아트가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할 움직임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세르지오 마치오네 피아트 회장이 이탈리아 노동법 때문에 내년 1월 이탈리아를 떠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마치오네 회장은 "피아트는 세계 30개국에서 181개 공장을 운영 중이지만 이탈리아만큼 기업을 하기에 모순된 환경은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노정(勞政) 유착은 이탈리아의 얘기만이 아니다. 유럽 재정위기의 핵으로 꼽히는 그리스는 은퇴자에게 연봉의 95%를 연금으로 지급한다. 방만한 재정 운용의 기원은 1970년대 초반부터 좌파인 사회당과 우파인 신민주당이 집권 싸움을 벌이면서 시작됐다. 경쟁적으로 노동자단체와 손을 잡았고,각종 수당을 신설하며 표를 얻었다. 2000년 이후 그리스 공무원들의 임금 상승률이 유로존 평균의 두 배에 달한 것도 정치권과 공무원노조 간의 합작품이다. 그리스는 실업률이 높아졌을 때 공무원 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눈속임을 해왔다. 2004년부터 5년간 공무원 수를 7만5000명 늘렸다. 공공 부문 종사자의 25%가 과잉 인력으로 분류된다.

스페인은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된 1970년대부터 정치인들이 북유럽 국가의 복지 모델을 도입했다.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으면 주요 의료시설을 1유로에 이용할 수 있는 의료보험제도가 대표적이다.

로마=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