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목티에 청바지까지 입고 PT…맥북 먹통돼 비웃음 산 '무늬만 잡스'
정보기술(IT) 기업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는 최근 '애플빠' 직원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던 지난 6일.김 대리는 '잡스는 천재이긴 하지만 독불장군 같다'며 흠을 잡았다가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야 했다. "동료들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잡스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흡사 광신도처럼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 당황했습니다. 애플빠들 앞에서 함부로 잡스 흉을 보다 의리 상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

잡스가 세상을 떠난 지 2주 가까이 지났지만 '잡스 신드롬'은 여전하다. 인터넷에서는 'RIP(Rest in Peace · 평화롭게 잠드소서) 스티브'라는 대화명이 넘쳐 난다. 네티즌들은 검은 리본 대신 애플사 로고인 '한입 베어 문 사과'를 내건 채 애도를 표하고 있다. '인류는 큰 손실을 입었다''IT 신기원을 이룩한 잡스는 아인슈타인' 등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역작인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김과장 이대리들의 직장 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첨단 모바일 기기로 여가 시간과 직장 업무 스타일의 대변화가 일어났지만,한편에선 잡스(Jobs) 때문에 잡리스(실직 · jobless)를 걱정하는 직장인들도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잡스 때문에 울고 웃는 이 시대 김과장 이대리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허드렛일 줄여준 '잡스'

한 통신회사에서는 얼마 전부터 회의 시간에 프린트물이 사라졌다. 그덕에 이 회사 기획팀에 근무하는 박 대리는 잔업무가 크게 줄었다. 팀의 막내인 그는 과거 업무 회의가 열릴 때마다 참석자들 숫자에 맞게 적게는 수십장,많게는 수백장을 인쇄해야 했다. 하지만 요즘은 발표자가 웹 클라우드에 발표자료를 올리면 참석자들이 각자 회의 시간에 태블릿PC로 다운받는다. 지난해 회사 전체에 태블릿PC를 보급하면서 회사 내부 자료도 태블릿PC를 통해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잡스덕에 허드렛일이 줄고,그 시간에 일다운 일을 더 할 수 있게 된 셈이죠."

스마트폰과 태블릿PC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에게는 족쇄로 작용하기도 한다. A사에 근무하는 문모 대리는 몇 달 전 예비군 훈련장에서 업무를 처리한 경험이 있다. 예비군 소집통보를 받았을 때 '오늘 하루 휴가다'며 좋아했던 문 대리.훈련장에서 안보 교육을 받으며 잠을 청하던 그에게 팀장의 문자 메시지가 왔다. "태블릿PC로 경쟁사 자료 찾아서 바로 보고해 줄 수 있지?" 기분좋게 몰려 오던 졸음은 확 달아났다.

◆무늬만 잡스

직장인들이 잡스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프레젠테이션 장면이다. 아이폰 등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잡스가 선보였던 프레젠테이션 모습은 직장인들에겐 동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섣불리 따라했다간 낭패를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교육컨설팅업체에 다니는 이모 차장이 그런 케이스다. 평소 혁신에 대한 요구가 큰 고객사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맡게 된 이 차장.그는 고객사의 신임 교육담당임원이 잡스 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최대한 잡스 분위기가 나도록 PT 준비를 했다. 잡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색 터틀넥 니트에 청바지,뉴 발란스 운동화까지 맞춰 신었다. 여기에 완벽한 구색을 위해 애플의 '맥북'까지 준비했다.

발표 당일 잡스를 표방한 이 차장의 첫 인상에 교육담당임원은 호기심을 보였고,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악재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갑자기 맥북이 작동하지 않은 것.한참 동안 방법을 강구했지만 무심한 맥북은 눈을 뜨지 않았고,기다리다 지친 임원은 자리를 떴다. 이 차장은 사정을 얘기하고 양해를 구한 뒤 천신만고 끝에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직후 이 차장에게 붙여진 별명은 '무늬만 잡스'.

◆잡스 때문에 '잡리스' 걱정

잡스 때문에 잡리스를 걱정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대기업 A사에 다니는 박모 대리는 요새 담배를 피울 때마다 표정이 어둡다. 사내에서는 '침도 마음대로 못 뱉는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에서 앞날을 얘기하다 보면 걱정이 쌓인다. A사의 가장 큰 고민은 스티브 잡스가 촉발한 스마트폰 경쟁에서 초기 대응을 잘못해 경쟁사들과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것.상황이 그렇다보니 인력 구조조정에 대한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 온다. "스티브 잡스가 죽은 날 한 동료가 이런 얘기를 하데요. '이제 잡스가 없는 잡스리스(Jobsless)가 됐는데 우리의 잡리스(jobless)걱정은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 건지' 회사 간부들 중에는 꼭 '스티브 잡놈'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어요. "

◆디지털 디바이드

잡스 때문에 우는 사람은 A사 사람들만은 아니다. 스마트폰은 직장 간부들에게 '디지털 디바이드'의 스트레스를 증폭시킨 애물 단지이기도 하다.

한 철강업체는 최근 모든 임원들에게 아이패드를 지급했다. 그러나 임원들 90% 이상이 태블릿PC 작동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다. 이 회사에 근무하는 김모 과장은 직속 팀장에게 아이패드 작동법을 설명해 주기 위해 하루에 세 번씩은 팀장 방에 불려가야 했다. "제대로 활용도 못하는 임원들에게 아이패드를 준 것부터가 '개발에 편자'격이죠."

반면 '피나는 연습'을 통해 모바일 기기 작동법을 습득해 내는 임원들도 있다. 중견 기업에 다니는 임모 상무는 얼마 전 회사가 임원들에게 아이폰을 지급한 이후 심한 부담을 느꼈다. 임 상무는 기계치인 데다 시력마저 떨어져 기존 휴대폰 주소록도 부하직원이 업데이트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부하 직원에게 사용법을 배우며 생각보다 간편하다는 걸 알게 됐고 활용 내공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업무는 물론 골프와 낚시 같은 레저활동에도 효율적으로 이용하면서 이제는 한수 가르쳐줄 수준이 됐다. 임 상무가 김 과장에게 주는 스마트폰 훈수 한마디."김 과장,AV 플레이어 깔면 인코딩 안해도 돼!"

강경민/윤성민/강유현/강영연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