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자본주의 4.0과 샌델에 열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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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국가가 '잘하면' 된다?…허망한 권위주의적 기대 접어야
정규재 논설실장
정규재 논설실장
더타임스의 경제편집장이 쓴 책이 '자본주의 4.0'이다. 고전자본주의 1.0 에서 케인스의 2.0과 신자유주의 3.0을 지나 이제 4.0으로 진화하자는 주장이다. 청와대의 대통령 측근들이 강조하는 진화적 공생발전도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모양이다. 경제가 진화한다는 것과 진화를 계획한다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것이 청와대 측근이나 저자인 칼레츠키의 오류만은 아니다. 오류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자는 낭만주의 루소나 마르크스의 혁명론에까지 좌익 사상 전반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 자본주의는 망할 것이라는 예측과 그러므로 망하게 만들자는 주장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이 책을 읽다보면 실로 어이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대중의 반시장 정서가 아니라 지식인들의 '반정부 정서'가 저자의 고민이다. 선(善)한 정부가 '자~알하면' 모든 시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왜 정부를 불신하냐는 항변이다. 정부와 시장이 대립만 할 것이 아니라 잘 협조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덧붙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정부 조직과 시장 기구를 마치 별개의 대립적인 사회조직으로 혼동하고 있다. 추상적 정부를 구체적 행정부처와 혼동하고 전경련을 시장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4.0의 정책을 언급한 부분은 좌충우돌이어서 무정부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겠다. 미국은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내면 되기 때문에 국가부채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저자는 대외지급 능력과 국가부채를 혼동하고 있다)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재앙적 결과를 피하기 위해 "일련의 정교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면 실로 궁색해지고 만다. 무엇이 정교한 정책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아니 그런 설명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
정부 규모는 더 작아져야 하고 정부 권능은 더 커져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런 조립이 가능하다는 순진성이 부럽다. 민주주의가 잘 돌아가야 하고 여론의 힘을 줄이는 것이 좋다는 주장에 이르면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콤플렉스를 드러내고 만다. 좌파 지식인의 우파 전향인 셈이다. 정부 지출은 줄이고 세금은 늘리자는 모순된 주장도 그렇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유능한 정부가 '자~알하면 된다'는 것이다.
터놓고 대화하고,신중하게 접근하고,신뢰가 회복되어야 하며,좋은 정치인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 측근들이 가는 곳마다 떠들어댈 뿐더러 언론까지 가세해 4.0을 부풀리는 것은 한국 지식계의 황폐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저자 자신도 애매모호함이 4.0의 특징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원칙과 변칙,복잡성과 모호성을 이런 식으로 짜깁기하면 곤란하다.
샌델 열풍도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억대를 넘기는 거액의 강사료를 받고 지난주 한국을 다녀간 샌델은 소위 공동체주의자다. 공동체의 가치에 헌신하는 덕성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도 아름답지만 공동체 가치기준을 누가 정하는지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다. 포퓰리즘이거나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라야 가능한 세계관이다. 상인의 폭리를 비판하고 가치배분에서 시장원리를 배제하자는 철학이 이토록 유행하고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의외다. 최고의 플루트는 플루트를 가장 잘 부는 사람에게 배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가 플루트를 가장 잘 부는지,누가 플루트 분야에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있는지의 판단 기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정부라는 우월적 판단자를 전제해야 비로소 풀리는 문제다. 그게 공동체주의라는 사상의 함정이다. 폭리는 상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공급이 만들어진다는 시장역학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도덕적 구호를 현실의 해법인 것처럼 가장하는 이런 수법도 매우 오래되었다. 마치 박원순 씨가 그래왔던 것처럼 서울대 법대라는 권위(아쉽게도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와 하버드대 교수요 더타임스 편집장이라는 권위에 의존한 고약한 마케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실로 어이없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대중의 반시장 정서가 아니라 지식인들의 '반정부 정서'가 저자의 고민이다. 선(善)한 정부가 '자~알하면' 모든 시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왜 정부를 불신하냐는 항변이다. 정부와 시장이 대립만 할 것이 아니라 잘 협조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덧붙인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정부 조직과 시장 기구를 마치 별개의 대립적인 사회조직으로 혼동하고 있다. 추상적 정부를 구체적 행정부처와 혼동하고 전경련을 시장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4.0의 정책을 언급한 부분은 좌충우돌이어서 무정부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겠다. 미국은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내면 되기 때문에 국가부채에 대해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저자는 대외지급 능력과 국가부채를 혼동하고 있다)은 또 그렇다 하더라도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재앙적 결과를 피하기 위해 "일련의 정교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면 실로 궁색해지고 만다. 무엇이 정교한 정책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아니 그런 설명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
정부 규모는 더 작아져야 하고 정부 권능은 더 커져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그런 조립이 가능하다는 순진성이 부럽다. 민주주의가 잘 돌아가야 하고 여론의 힘을 줄이는 것이 좋다는 주장에 이르면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콤플렉스를 드러내고 만다. 좌파 지식인의 우파 전향인 셈이다. 정부 지출은 줄이고 세금은 늘리자는 모순된 주장도 그렇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유능한 정부가 '자~알하면 된다'는 것이다.
터놓고 대화하고,신중하게 접근하고,신뢰가 회복되어야 하며,좋은 정치인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 측근들이 가는 곳마다 떠들어댈 뿐더러 언론까지 가세해 4.0을 부풀리는 것은 한국 지식계의 황폐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저자 자신도 애매모호함이 4.0의 특징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원칙과 변칙,복잡성과 모호성을 이런 식으로 짜깁기하면 곤란하다.
샌델 열풍도 마찬가지다. 놀랍게도 억대를 넘기는 거액의 강사료를 받고 지난주 한국을 다녀간 샌델은 소위 공동체주의자다. 공동체의 가치에 헌신하는 덕성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도 아름답지만 공동체 가치기준을 누가 정하는지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다. 포퓰리즘이거나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라야 가능한 세계관이다. 상인의 폭리를 비판하고 가치배분에서 시장원리를 배제하자는 철학이 이토록 유행하고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의외다. 최고의 플루트는 플루트를 가장 잘 부는 사람에게 배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누가 플루트를 가장 잘 부는지,누가 플루트 분야에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있는지의 판단 기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정부라는 우월적 판단자를 전제해야 비로소 풀리는 문제다. 그게 공동체주의라는 사상의 함정이다. 폭리는 상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공급이 만들어진다는 시장역학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도덕적 구호를 현실의 해법인 것처럼 가장하는 이런 수법도 매우 오래되었다. 마치 박원순 씨가 그래왔던 것처럼 서울대 법대라는 권위(아쉽게도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와 하버드대 교수요 더타임스 편집장이라는 권위에 의존한 고약한 마케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