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 때보다 더 공포스럽다"…佛 5대 은행, 1500억 유로 지원요청
프랑스 파리의 라데팡스는 파리의 월스트리트다. 소시에테제네랄 BNP파리바 등 프랑스 은행과 금융회사들이 밀집한 신시가지다. 지난 11일 아침 지하철 라데팡스역.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과 함께 10분 정도 걷자 프랑스 3대 은행 중 하나인 크레디아그리콜 투자은행부문 본사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만난 에르베 굴렛퀘르 국제금융 시장조사부문 대표는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공포스럽다"고 말했다.

굴렛퀘르 대표는 "리먼브러더스가 도산했을 때는 각국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이번에도 정부가 돈을 쏟아붓기엔 빚이 너무 많다"고 우려했다. 크레디아그리콜은 지난달 무디스로부터 신용등급을 강등당했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 재정위기국 국채를 많이 보유했다는 이유에서다.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유럽은행

"리먼 때보다 더 공포스럽다"…佛 5대 은행, 1500억 유로 지원요청
2008년 리먼브러더스 부도 때 불어닥쳤던 해고와 도산의 공포가 라데팡스를 다시 휩쓸고 있다. 벨기에와 프랑스 정부는 양국 합자은행인 덱시아에 10년간 900억유로 규모의 지급보증을 제공키로 했다. 배드뱅크를 설립,부실채권도 처리할 방침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지난 10일 프랑스 5대 은행이 자본확충을 위해 정부에 1000억~1500억유로를 요청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달 초엔 500억유로 정도면 될 것이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규모가 열흘 만에 세 배로 늘었다. 독일 도이체방크도 정부가 공적자금을 지급하길 기다리고 있다.

유럽의 대형 은행들을 공포 속으로 몰고 간 것은 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국가 채권.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유럽은행들은 돈을 굴릴 곳을 찾지 못했다. "기업 대출이 줄면서 안정적 수익원으로 그나마 꼽을 수 있게 된 것이 PIIGS국가 채권"(제롬 크릴 프랑스경제현황연구소(OFCE) 부소장)이었다. 2009년 그리스 국채 10년물의 금리는 연 4.44~6.14%였고 독일 국채 10년물 금리는 연 2.91~3.73%였다.

크릴 부소장은 "은행들이 그리스 부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위험(리스크)'이라고 판단한 게 실수"라고 지적했다. 프랑스 은행들의 그리스 국채 투자액은 567억달러,이탈리아 국채 투자액은 3926억달러다. 이탈리아 국채에 전 세계 24개국 은행들이 총 8673억달러를 투자했는데 프랑스 은행들이 그 중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독일 은행들도 그리스 국채에 340억달러,이탈리아 국채에 1623억달러를 각각 투자했다.

◆전 세계로 전염되는 위기

프랑스 은행권으로 옮겨붙은 위기의 불길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신용평가사 피치는 지난 14일 스위스 UBS,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등 5개 유럽 은행의 신용등급을 낮췄다.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프랑스 은행에 대출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지난 두 달간 주가가 40% 이상 급락했다. 피치는 이 은행과 골드만삭스를 부정적 관찰대상에 올렸다.

이번 위기는 유럽이 '공동 책임' 체제에 들어가야 해결될 수 있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지금은 유로존이 통화정책만 공통으로 쓰고 있는데 앞으로는 재정정책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하엘 하이제 알리안츠그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유로존은 재정위기 부담은 공동으로 지면서 재정정책에 대한 책임은 따로 두는 '중도적 방식'을 택하고 있다"며 "이런 방식은 일관성이 부족해 언젠가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로존 내에서 경제 · 회계적 통합을 이루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리=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